신세계

자성 청 중구 :: 스토커 AU 02

auferstehung 2015. 1. 24. 22:39

 https://www.youtube.com/watch?v=tuuxnziJJS4&list=PLb8ovsbeJDahQ-CbA_jdZ49OHHhUeegbe&index=15






삼촌, 어디 가요.”

 

자성의 색 없는 목소리가 청의 뒤통수에 박혔다. 청이 천천히 뒤돌았다. 새벽녘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은 모든 것을 흐리게 만들었다. 자성이 모로 누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구 있어, 삼촌 다녀오께잉?”

어디요?”

느 모르는 데.”

말해줘요.”

말해줘도 모를거여.”

 

그래도 말해줘요. 자성이 손을 뻗어 청의 셔츠를 잡았다. 청이 씩 웃으며 자성의 손을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이내 잠그던 단추를 마저 잠그기 시작했다. 속옷도, 바지도 대충 껴입고서는. 청은 여전히 모를 사람이었다. 어젯밤 제 손을 끌고, 몸까지 섞었는데도. 청이 방문을 열었다. 자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삼촌.”

?”

“...아니에요.”

 

한 마디도 없이 다시 뒤돌아서 나가는 청, 그가 매일 어디 가는지 중구에게 몇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실실 웃는 얼굴과 함께. 청의 이야기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몸을 섞는다는 게, 이렇게나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새벽빛이 흐렸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자성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대충 면바지에 다리를 우겨넣고 청을 뒤따랐다.

 

삼촌.”

 

흰 자켓을 입은 청의 뒷모습이 저렇게나 선명한데, 어딘가로 증발해버릴 것 같았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위태로웠다. 청이 천천히 뒤돌았다.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녹아버려서 온 마룻바닥을 다 채웠다. 자성의 발목까지 차올랐다. 천천히, 하지만 빠지는 곳 없이 그의 눈동자가 차올랐다. 흐린 빛이 그것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들었다. 자성은 천천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익사할 것 같았다. 청이 완전히 뒤돌아 자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성은 떨리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잡지 않았다. 자성의 숨이 풀린 건 바로 그때였다. 청의 표정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

 

자성이 목을 매만졌다. 눈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관에서 새나오는 빛만 가득했다. 떨리는 숨을 천천히 고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청은 다시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었다.


“...우산, 가져가요.”

 

할 말은 많았지만, 자성은 겨우 그 말만을 목구멍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청이 웃으며 삼단우산을 집어 들었다. 자성에게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한번 까딱한 검은 우산은 꼭 장례식에 간다는 무언의 표시 같았다. 자성은, 닫힌 현관문만 뚫어져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올 때까지.

그 이후로 자성의 눈동자는 청의 등 뒤에 항상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본 중구와 청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곤 했다.

 


 

토끼 다음은 들개였다.

갈대밭 맞은편, 야산에서 세 마리씩 무리지어 돌아다니던, 비쩍 마른 들개들을. 중구는 풀이 패인 곳을 보여줬다. 이게 동물들이 다니는 길이야. 그리고 검은 비닐봉투에서 피 뭉텅이를 주섬주섬 꺼냈다. 저번에 배를 갈랐던 토끼였다. 자성은 제가 버린 토끼의 태아를 살폈다. 여전했다. 손가락 마디만한 것들, 자성은 그것을 다시 비닐봉지에 던졌다. 무리 중 임신한 들개가 있었으면. 미끈한 손가락을 대충 코트에 문지르고 총을 고쳐 잡았다.

 

아무리 봄이라도 초봄이라 먹을 게 없었을 거다.”

 

그들이 가는 길가에 피가 덕지덕지 흐를 것이다. 굶주리고 포악한 들개들은, 비쩍 마른 뱃가죽을 채울만한 것들을 찾아 온 야산을 헤매고 다니겠지. 청둥오리를 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기다림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성은 중구를 올려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점을 노려보고 있었을 뿐. 쌍꺼풀 없이 길게 빠진 눈꼬리가 차갑게 빛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비쩍 마르고 흰 개 한 마리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중구의 눈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자성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급히 가져다 댔다. 하지만 중구가 손을 들어 막았다.

 

에헤이, 아직.”

왜요?”

한 마리밖에 없잖아. 분명 또 한 마리 올 거라고. 아니면 두 마리.”

 

흰 개가 그것의 냄새를 맡았다. 정말 중구의 말이 맞았다. 흰 개는 꼬리를 흔들었고, 이윽고 뒤쪽에서 흙빛 개 한 마리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등장했다. 중구가 자성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내 말이 맞지? 그러나 웃음은 짧았다.

 

네가 하얀 거, 내가 누런 거.”

제가 황구 쏠래요.”

 

뭐어, 마음대로 해라... 중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여간 새끼, 회장님 닮아서 고집도...”

 

자성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중구와 거의 비슷하게 쏴야 했다. 잠깐의 텀이라도 두면, 금방 도망칠 게 뻔했기 때문에. 숨을 들이쉬는 소리, 건너편 갈대밭에서 나는 갈대들의 합창.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적막을 찌르는 총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중구의 총알이 정확하게 흰 개의 이마를 관통했다. 흰 털이 금방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머리가 터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성은 이마를 쏘지 않았다. 이마 대신 배를 쏜 탓에 누런 개는 비틀거리며 필사적으로 도망갔다.

 

, 미쳤어? 내가 한 번에 죽이라고 했잖아.”

 

자성은 중구의 타박을 뒤로 하고 덤불에서 뛰쳐나왔다. 노란 털은, 죽은 풀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온 중구가 자성의 어께를 잡았지만 자성은 그 개가 간 길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마를 맞출 수 없어 맞추지 않은 게 아니다.

그 개는 새끼를 배고 있었다.

 

중구가 투덜거리며 흰 개를 확인했다. 머리가 아주 날아갔구만. 중구가 개의 뒷다리를 잡고 차로 끌고 갔다. 질질 끌리는 몸뚱이가 잘게 경련했다. 아직 살아있었다. 중구는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때마다 다리를 휙 잡아당겼다. 자성은 총을 들고 따라가면서 생각했다. 숨을 끊을 줄 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숨을 끊는 것, 내 숨도, 짐승의 숨도. 중구가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무성의하게 공구 상자를 던졌다. , 피 먼저 빼고 있어봐라. 그가 담배를 빼물었다. 그는 사냥한 것을 해체할 때 항상 담배를 피우곤 했다.

 

, 대가리가 날아가 버려서 가를 필요가 없겠네.”

 

아쉬운 대로 이렇게 하자. 중구가 개의 허벅다리에 날카로운 갈고리를 걸었다. 그리고 간이책상에 걸었다. 그 모양새가 꼭 정육점 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성이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은 아무 색도 없었다. 정말로.

 

비 올 거 같다. 빨리 하고 가자.”

 

중구가 자성에게 목장갑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입에 문 담배 때문에 더 뚱하게 들렸다. 다운자켓 모자에 붙어 있는 갈색 털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자성이, 거 좀 가르고 있어봐라. 중구가 주머니칼을 던졌다. 분홍색 배, 다른 개 같았으면 툭 튀어나왔을 텐데. 살짝만 칼을 대도 툭, 하고 터졌을 텐데. 자성이 견적을 잡는 듯 칼끝을 살짝 댔다. 푹 찌르고, 내장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며 자성이 청 생각을 했다. 제법 불어오는 바람에 불을 붙이던 중구가 그런 자성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토끼의 내장과 개의 내장은, 정말로 달랐다. 크기부터가 다르고, 이건 뭔지, 그리고 저건 뭔지. 목장갑은 영 불편했다. 불친절한 중구의 부름이 자성의 뒷덜미를 찔렀다. .

 

맨손으로 해.”

그래도 돼요?”

누가 뭐래, 하고 싶으면 하든가드러운 거 다 나오잖아.”

 

중구가 내장을 박박 긁어냈다. 자성은 한쪽 목장갑을 벗고는, 톱으로 갈비뼈를 썰기 시작했다. 텅 빈 개 뱃속이 허전했다. 자성은 아까 놓친 황구 생각을 했다. 찢어진 배에서는 피만 줄줄 새진 않겠지. 그 개, 배가 제법 불렀던데.

 

무슨 생각 해. 아까 놓친 거?”

“....”

놓친 건 그렇게 살다가 반병신으로 뒈지는거야. 피가 많이 나와서 죽거나, 감염돼가지고 온몸이 썩어서 뒤지거나.”

“...”

새끼 배고 있더라.”

“....”

일부로 쐈냐?”

“...”

 

자성은 아무 말 없이 허벅다리를 썰었다. 그 모습을 보던 중구가 비리게 웃었다. 덜컹 하고 간이 책상이 흔들렸다. 오른쪽 다리가 풀썩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친 새끼.”

 

웃음이 잔뜩 섞인 말이 톱처럼 저를 써는 것 같아 자성이 뒤돌았다. 중구는 의외로, 아주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배부른 포식자의 웃음이었다. 자성은 다시 왼쪽 다리에 톱을 댔다. 중구의 웃음이, 새끼를 밴 개보다 더 생각날 것 같았다.

 

오늘은 이쯤 하고 가지.”

아직 다 안끝났는데...”

 

자성이 아쉬운 듯 톱을 멈췄다. 중구가 목장갑을 벗으며 웃었다. 그리고 자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성은 처음 중구와 사냥 간 날을 생각했다. 우리는 공범자라고 그랬었지. 귀 언저리에 바로 작게 들려오는 중구의 목소리가, 정말로 큰일을 끝낸 패거리 같았다.

 

그건 그쯤 하고 버려.”

 

삼촌이, 그 놓친 개 찾아줄게. 귓가에 스치는 속삭임이 달았다. 자성이 중구를 쳐다봤다. 아까 봤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자성이 금방이라도 톱을 떨어트릴 것 같았다. 공범자, 패거리, 그리고 중구 삼촌. 자성이 트렁크를 뒤지는 중구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덜렁덜렁 간신히 몸뚱이에 붙어 있는 흰 털의 허벅지를 봤다. 자성은 거기에 박힌 갈고리를 표정 없는 눈으로 뺐다. 한참 트렁크를 뒤지다 중구가 몸을 일으키며 욕을 마구 내뱉었다.

 

에이, 씨발 니미...”

왜요?”

물이 없어. 수건도 없고.”

 

피투성이 공구들을 공구함에 마구 집어넣은 중구는 목장갑으로 대충 손의 핏기를 닦았다. 자성의 손에서도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피투성이 손으로 운전을 하는 중구를 보고, 자성은 뒷자리에서 빙긋 웃었다. 기어도, 핸들도 모두 붉었다.

 

중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 적신 수건으로 핸들이고 기어고 손잡이고 모두 닦기 시작했다. 바싹 마른 피는 손을 댈 때마다 가루가 되어 온 사방천지를 다 더럽히기 때문이었다. 자성은 가만히 뒷문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선 청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박자도 없고, 음도 없었다. 그저 손 가는대로 치는 것 같았다. 자성은 그 뒤로 다가갔다. 소리 없이 놀라는 청을 제 피투성이 두 팔로 가둔 자성은 천천히 그를 따라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하얀 건반이 붉게 물들었다. 자성은 하얀 털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렸다. 가볍게,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게 털 사이로 스며드는 붉고 따끈한 피. 자성은 청의 옆에 앉았다. 머뭇거리다 그가 손댔던 그 자리를, 청이 따라간다. 그의 손가락도 붉은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검고 매끈한 피아노에 비친 청의 얼굴을, 자성이 응시한다. 그의 손가락이 붉게 변한 게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손은, 원래부터 붉지 않았을까. 원래부터 붉었던 그 손가락은, 나로 하여금 조금 더 붉어진 게 아닐까. 그는 자성을 쳐다보지 않았다. 지저분한 피때가 붙어있는 건반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네 손이 치는 피아노 또한, 보라색 소파처럼 처음이었다. 피아노 소리가 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뱉는 숨소리는 선명했다. 귀가 먹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