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기태 :: 괴물의 산실
"우리 화이는 어떤 아빠가 제일 좋아?"
동범이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열 살 남짓 된 화이는 녹색 소파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까맣고 큰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은 채 데굴데굴 굴러가고 앙다물린 입술이 가만히 달싹댔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 일에 태연한 척 하지만 모두들 화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화이는 이내 비밀스런 얘기가 있다는 듯, 아빠 귀 좀 주세요, 라며 손짓을 해댔다. 아빠가 제일 좋아, 이건 비밀이에요, 다른 아빠들한테는… 큰 비밀이라도 된다는 양 두 손으로 꼭 가린 자그만 손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이 묻어 있었다. 기태가 그 눈동자를 마주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난 사실 다른 걸 생각하고 있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새까만 눈동자를 기태는 잊을 수 없었다. 그날 밤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화이는 이내 손을 거두고 동범을 살폈다. 대답을 들은 동범은 만족한 듯 씩 웃으며 화이의 뒷머리를 크게 한 번 쓰다듬었다. 선천적인 애교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그 나이대 아이들의 애교를 흉내내며 살아남을 구멍을 찾고 있는 건지. 후자라면 아주 눈치 빠른 아이였고, 전자라도 딱히 정상적이진 않은 아이일 것이다. 화이는 그런 애였다.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는 것.
"화, 화이야, 아빠, 는?"
아빠는, 며, 몇 번째야? 기태가 잔뜩 상기된 볼을 내밀었다. 아, 아빠한테도 얘, 얘기해줘. 응? 화이는 미묘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떤 아빠가 제일, 제일 좋아? 분명 자신이 첫 번째를 차지하리라는 오만을 품은 질문들이었을텐데, 기태는 그저 다섯 손가락 안에 들기만 해도 괜찮다는 듯 잔뜩 부푼 볼을 하고 있었다. 화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아빠는… 그러나 뒷말은 갑작스레 나타난 석태에게 먹혀버리고 말았다.
"가자."
기태는, 다, 다음에 꼭, 아, 알려줘야 해. 하고 화이의 손을 꼭 잡았다. 이내 문 저쪽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열 살의 화이가 아직은 못 가본 그곳으로, 바깥으로.
*
기태는 하늘이 무너지는 꿈을 꾼다. 그의 곁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얼굴이 없을 지도 모른다. 형, 애는 어떻게 키워야 돼? 끝없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기태는 석태를 찾는다. 별 거 있나, 잘 해주면 되겠지. 석태는 없고 목소리만 가득하다. 어떻게 하는 게 잘 해주는 거야? 화이는 어딨을까. 이내 기태는 화이를 생각한다. 비행운이 생길지도 몰라. 기태는 끝없이 떨어진다. 어디선가 범수가 말한다.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내뱉듯 얘기하는 게 딱 범수다. 하지만 범수도 목소리밖에 안 들린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기태는 주위를 둘러본다, 완전히 혼자다. 떨어지는 건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화이는 끝까지 부르지 않는다. 떨어지는 건 자기 혼자로도 족하다. 하지만 화이가 날 몇 번째 아빠로 생각하는 지 궁금한걸… 기태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추락의 끝은 결국 산산조각이다. 퍽, 떨어지는 순간 기태는 찌르는 통증에 벌떡 일어났다.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눈은 쉽사리 다시 감길 생각을 않았다. 명치가 너무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 기태는 입술을 삐죽이며 천천히 아랫층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