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au



http://www.youtube.com/watch?v=peZk5vPJ8kM








당신이 내게 온 후에 나는 혼란에 빠졌어요. 나는 당신의 등장을 되돌리고 싶어요. 당신이 내 머릿속에서 배회하지 못하게. (장석원, 태양의 연대기)




 

조돌석은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롤랑 바르트의 한 구절처럼, 언어는 세상을 만지는 손가락이었다. 우아하고 긴 손가락. 돌석은 제 손가락을 바라봤다. 펜을 오래 잡은 손은 투박했다. 그의 방은 어두웠다. 책과 종이와 원고지가 이곳저곳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은 깔끔한 편에 속했다. 그가 가만히 창문을 내려다봤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어느새 크게 자라버린 나무 때문에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몇 년째 눈과 비를 맞아 뽀얗게 지저분해진 창문이다. 돌석이 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안경을 썼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그만큼 잔병도 많았다. 봄은 올 기미를 영 내비치지 않았다. 돌석의 봄 또한 그랬다. 시인, 작가, 평론가. 유명세를 제법 타기도 했고, 추문 한 번 터진 적도 없었다. 쉰다섯 살,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였지만 돌석은 제 봄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것은 다섯 달 전이었다. 그는 제가 쓰는 언어를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죽음과, 혹은 증오와 함께했다. 돌석이 주먹을 꼭 쥐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끄적이다 버린 원고지만 다섯 묶음이 넘었다. 일기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겨울은 가혹한 계절이었다. 풍족한 계절은 지나가고, 이 땅 위에 놓인 것은 싸그리 사라져가는 계절. 문단에 등장하지도 않았고, 문인들과의 만남도 죄다 거절했다. 잔병은 점점 자주 찾아왔다. 말은, 글은, 언어는 이제 그에게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런 돌석이 하나 친근하게 두는 사람이 있었다. 판수였다. 그는 문인도 아니었고,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는 사람 또한 아니었다. 돌석과는 사뭇 다른 남자였지만, 그들은 제법 친근하게 지냈다. 자신의 업을 이야깃거리로 삼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돌석에게 판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으음, 겨울이 다 그렇지.”

가사 일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사람이 많이 없는 교외였지만 집은 제법 많았다. 모두 떠나간 집이었다. 큰길엔 오래 된 감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정류장 표지판이 간신히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십 분만 나가면 시내가 있었다. 한 시간 반마다 한 대씩 오는 버스는, 턱을 넘길 때마다 미친 듯이 삐그덕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창가를 보고 있으면, 꼭 어딘가 사라진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무들이 앙상했다. 잔디는 누랬고. 돌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늦은 점심 집에 돌아온 돌석은 마당 제 흔들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하얀 교복 셔츠에 진회색 교복 바지, 검푸른 니트 조끼를 입고 있는 남자아이. 신발은 지저분한 하얀 캔버스화였다. 신발끈도 대충 묶은 모양새였다. 돌석은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판수가 현관을 열고나와 돌석을 반겼다.

 

아니 무슨 일을 그렇게 보고 오셨습니까, 없길래 기다리다 지쳐 쓰러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 애는?”

, 일하고 싶다던데요.”

?”

아이고, 애 깨겠으니 들어가서 얘기하십시다.” 

 

공진은 이 근처에 살고 있는 학생이었고, 돌석도 여러 번 오가다 본 장미색 벽돌집에서 살고 있는 아이였다. 나이는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집안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의 팬이라며 개인적으로 그 일을 하고 싶다고 먼저 연락한 것 또한 공진이었다. 판수가 대충 알아본 바로는, 어머니가 안 계시고, 버스로 30분 걸려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 집안 사정은 별로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는 것. 하지만 책을 읽는 것을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소년이라고 한다. 제 입으로도 친구가 없다고 배시시 웃으며 멋쩍게 이야기하는 아이. 돌석은 가만히 공진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외로운 소년, 지저분한 캔버스화를 신은.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고, 집 열쇠를 챙기고, 아버지에게 눈인사를 하고 집을 나와, 그도 그 큰 감나무를 보고 길을 걸어오겠지. 작은 엠피쓰리에는 어떤 곡이 들어 있을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때는 이어폰을 끼고 불퉁하게 길을 걸어올 것이다. 십분, 십오 분 정도 버스를 기다리고, 그도 돌석과 같은 버스를 탈 것이다. 학생 요금 칠백 오십 원, 버스카드를 찍고 뒷자리에 앉아 차창에 이마를 댄다. 삐걱대는 버스 소리는 소년의 자장가가 되었다. 간혹 버스를 놓치는 날에는,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겠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던 돌석은 판수의 헛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주말엔 점심께, 평일엔 일주일에 두 번 온다고 하데요.”

 

그렇구먼, 돌석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학기가 시작되면 오지 않는 건가?”

그렇겠지요, 근데 그거에 대해선 이야기를 많이 못 했습니다. 그건 알아서 정할 문제고.”

 

판수가 부산하게 짐을 챙기는 동안, 창문 너머로 어느새 공진이 다가왔다. 슬쩍 눈치를 보는 것이 그 나이 대의 고등학생 같았다. 공진이 돌석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돌석이 작게 웃으며 가볍게 손인사를 했다. 공진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유리에 막혀 뻐끔대는 입모양밖에 보이지 않았다. 돌석은 창문을 두드렸다. 공진과 눈이 마주쳤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돌석은 제 귀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안 들려. 공진이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어리구나.”

 

공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돌석은 손사래를 치며, 현관문으로 들어와도 된다며 현관문 쪽을 가리켰다. 공진이 사라진 배경은, 다시 겨울의 늙은 마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굳이 큰길까지 배웅하겠다는 돌석을 억지로 앉히고 판수가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아프다면서, 집에서 가만히 쉬고나 있어요. 불퉁하게 내뱉는 말은 판수만의 애정표현이었다. 돌석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판수가 나가고, 공진이 들어왔다. 공진이 제 앞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목 짧은 하얀 양말이 아슬아슬했다.

 

앉으렴, 이름이 뭐니?”

공진이요, 이 공진.”

열일곱 살이라고 했던가?”

.”

 

선생님 시, 좋아해요.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공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공진은 아마, 자장가를 들으며 꾸벅 꾸벅 조는 게 아니라, 돌석의 책을 몇 번이고 읽을 것이 분명했다.

 

고맙구나.”

 

공진이 고개를 들었다. 웃는 얼굴의 돌석이 보였다.

 

내일부터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니?”

 

, 당연하죠. 공진이 쉼 없이 제 손을 만지작댔다. 거실 벽마다 책장이 가득이다. 오래된 책의 마른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돌석이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 뭐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니?”

저요, , 아무거나 잘 먹어요. 따뜻한 국물 있는 것도 좋구, 오징어 볶음두요.”

 

전부 다 남이 해준 가정식이다. 혼자 먹는 밥에는, 국을 끓일 필요가 없지. 오징어를 한 마리 사도 혼자 먹기엔 너무 많다. 돌석은 가만히 공진을 쳐다봤다. 오늘은, 시금치 된장국을 끓여야지. 오징어를 한 마리 사다 공진이 오기 전 매콤한 오징어볶음을 할 것이다.

 

그러면, 내일은 점심을 먹지 않고 오는 편이 좋겠구나.”

 

공진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돌석을 쳐다봤다. 그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내일은 책을 좀 정리하려고 하는데. 돌석이 주위에 늘어진 책을 휘 돌아봤다.

 

이제 봄이 오잖니.”

 

공진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선생님.”

?”

,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 있는 책, 읽을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돌석이 커피잔을 정리하며 말했다. 겨우내 키가 조금 자랐는지 바짓단 아래로 복숭아뼈가 살짝 드러났다. 돌석이 황급히 눈을 거두고 커피잔을 내갔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공진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잔뜩 쓰러진 책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역시, 복사뼈가 보이는 하얀 발목 양말은 위태로웠다. 돌석은 안경을 벗고, 싱크대에 기대 제 미간을 꾹 눌렀다.

 

공진은 돌석의 집을 좋아했다. 도서실만큼 많은 책, 그리고 큰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빛. 공진이 꿈에 그리던 집이었다. 그곳에 엎드려 일기를 쓰고, 가끔 글을 썼다. 돌석이 그의 글을 보고 고칠 점 몇 가지를 말해 주기도 했다. 대부분은 부끄러웠지만, 알 수 없는 설렘이 찾아오기도 했다. 며칠간 돌석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같이 책을 정리했다. 공진은 책을 정리하다 돌석의 많은 것을 발견했다. 출판하지 못했던 원고 뭉치, 가끔 그가 신새벽에 복잡한 마음을 남몰래 털어놓은 찢어진 공책, 그리고,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공진은 그것을 제 바지 주머니에 조심스레 접어 넣었다. 선생님, 저도요.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돌석은 가끔 시내에 나가면 공진을 위해 달달한 디저트 같은 것을 몇 개 사오기도 했다. 생크림 케이크, 초코 무스 케이크, 매끈한 달걀 색의 밀푀유... 공진은 밤마다 그 달콤한 맛을 다시 곱씹으며 잠들곤 했다. 어두운 천장에, 달콤한 케이크 반죽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종이쪽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꼭 쥔 채로 잤다. 돌석에게 공진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말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공진의 언어는 맑게 빛났다. 젊음, 그것은 돌석에게 없는 것이었다. 가끔 공진이 쓴 글을 볼 때, 그가 쓰고 있는 일기를 어쩌다 힐긋 보았을 때. 세련된 문장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의 문장은 외롭고 예뻤다. 공진의 하얀 발목 양말과 캔버스는 설렘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제가 해준 점심을 맛있게 먹는 공진, 케이크를 먹고 씩 웃는 공진, 바닥에 엎드려 일기를 쓰고, 무릎을 꿇고 가지런히 책장에 책을 정돈하는 공진. 그리고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그의 문장. 젊음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열일곱 살 공진을, 쉰다섯 살 제가 질투한다는 게, 심지어 마음에 품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한 일이었다. 큰 유리창을 마주보고 닦으며 저를 뚫어지게 쳐다봤던 공진. 그 유리를 가볍게 두드리고,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던 그날. 돌석은 자신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돌석은 이제 공진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공진은 제법 아쉬워했지만, 돌석은 속으로 생각하길- 가증스럽게도, 도망치고 있었다.

공진은 특이하게도 전화나 문자를 하지 않았다. 대신 편지를 썼다. 같은 동네에 사는데도, 꼭꼭 눌러 쓴 글씨로 편지를 완성해, 삼십 원 우표 뒤에 침을 묻혀가며 버스 타러 가는 길 우체통에 넣는 것을 반복했다. 그 편지는 3일 후, 돌석의 집에 도착하고 돌석은 그만큼 늦은 공진의 하루를 알 수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고등학교 도서실에 갔고, 선생님이 해 주신 시금치 된장국을 먹고 싶었는데 시금치 한 단이 너무 많아 결국 썩어버렸다는 것. 오징어도, 돼지고기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는 여전히 없었고, 국어 시간에 글을 쓰다 빼앗겼다는, 그런 소소하게 우울하고 가슴 찔리는 이야기를, 공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가끔 편지 안에는 꽃 말린 것이 들어 있었다.

-저번 겨울부터 책에 들어 있었던 거예요.

답장은 항상 밤에 쓰곤 했다. 이제는 깨끗해진 방, 공진의 손이 닿지 않은 데가 없었다. 돌석은 가만히 그 책을 쓸었다. 편지의 마지막 말은 항상, 너도 많이 바쁠 텐데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부엉이 우표 뒤에 침을 바르며 돌석은 흐느꼈다. 누구보다 사랑하던 언어 뒤에, 비겁하고 옹졸하게도 숨고 있었다. 연정과 질투를 참지 못해서. 돌석의 답장이 오면, 공진은 그 후 며칠이나 돌석의 집 앞에서 서성였다. 낮고 하얀 울타리 너머로 공진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돌석은 애써 무시했다. 공진이 사랑했던 큰 창문은, 이제 커튼이 막고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공진은 항상 그의 집 앞으로 향했다. 커튼은 빛을 뭉갰고, 그만큼 뭉뚱그려진 인영이 움직이는 것을 보여줬다. 공진은 그거로도 충분했다. 그 사람이 돌석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공진은 돌석이 쉽게 옆을 내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뒤에 있었다. 가방에는 항상 돌석의 시집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서성이다, 열한 시 반이 넘어서야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돌석은, 오히려 겨울보다 더 잔병치레에 시달리고 있었다. 봄이 왔지만, 돌석의 봄과 공진의 봄은 같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편지 뒤에 숨어 서로의 마음만 던졌던 봄. 무엇보다도 잔인했던 계절이었다. 공진은 한 학기를 별 탈 없이 끝냈다. 그리고 공진의 편지가 끊겼다. 돌석은 몇 번, 편지가 없어 걱정된다는 내용을 써서 보냈지만 답장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집에 찾아갈 용기 또한 없었다. 여름이 시작됐다. 매미 소리가 요란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은 꼴꼴 소리를 내며 맑았다. 돌석은, 닫혀 있었던 커튼을 걷었다. 오래 방치된 유리는 뽀얗게 지저분했다. 이곳에도 공진의 손이 닿았을 것이다. 그래서 섣불리 닦지 못했다. 돌석은 아주 오랜만에, 정원을 정리하려 나왔다. 다 시든 봄의 꽃잎이 슬펐다. 그리고 말없이 흔들의자를 쓸었다. 공진이 이곳에서 자고 있을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하얀 양말, 끈도 제대로 못 묶은 캔버스, 진회색 교복 바지, 검푸른 조끼 니트, 그 위에 놓인 명찰, 이 공진. 곧은 콧대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잠들었다. 짙고 검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꿈의 버스를 타고 어느 세계로 가고 있었다. 세상이 푸르다. 집 안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창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봄에도 겨울이었다. 공진이 제 마음에 풀어놓고 간 파문은, 벽에 부딪혀 다시 물결을 만들고, 그 물결끼리 부딪혀 또 다른 물결을 만들고... 말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하복을 입은 학생들이 조잘대는 모습. 돌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세간의 눈을 제외하고서라도, 연모라는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렇게나 아팠다. 공진의 편지가 다시 시작됐다.

 

장대비가 거세게 오는 밤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꼭꼭 눌러 쓴 글씨체가 정갈했다. 그리고 의미 없는 구절이 가득했다. 공진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종이 위에 동그란 보풀이 군데군데 퍼져 있었다. 돌석은 그것을 가만히 만졌다. 물이, 떨어진 자국이었다. 눈물일 것이다. 편지가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아마 공진이 보낸 이 편지는 작은 아이로 변해 구석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을 것이다. 의미 없고, 문장구조도 맞지 않는 문단. 그리고 선생님. 저도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사랑은 분명 아름다운 현상이었지만, 가끔 병에 비유되곤 한다. 사랑의 열병, 그리고 사랑을 감염되는 전염병으로 보는 사람들. 그로 미루어 보건대, 사랑은 뜨거워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열이 바이러스처럼 이곳저곳 전이되는 현상이 분명했다. 돌석은 혐오와 연정 사이에서 괴로웠지만, 공진은 이곳저곳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문장이 그것을 대신 표현했다. 돌석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다. , , 하고 장대비가 유리창을 치는 소리가 났다. 돌석이 고개를 돌렸다. 공진이었다, 장대비가 아니라. 공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푹 젖은 채로 서 있었다. 돌석이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댔다. 새하얀 하복 셔츠가 푹 젖었다. 공진도 돌석이 손을 댄 바로 그 자리에 제 손바닥을 댔다. 돌석이 황급히 달려가 현관을 열었다.

 

공진아.”

 

공진이 천천히 돌석을 향해 걸어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께에 수건을 걸쳤다. 이 와중에도 흰 발목 양말은 돌석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그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돌석은 굳이 물어볼 생각을 않았다. 자신은, 물어볼 자격이 없었다. 공진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공진이 욕실로 들어갔다. 비 떨어지는 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돌석은 구급상자를 꺼내 식탁 위에 두고선 홍차를 우리다, 식탁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안경을 벗고 미간을 짚었다. 눈앞이 뽀얘지는 것은, 안경에 김이 서려서만은 아닐 것이다. 여덟 시 반이었다. 욕실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공진에게 돌석은 제 옷을 쥐어줬다.

 

맞을까 모르겠구나.”

괜찮아요.”

 

못 본 새에 많이 자랐구나. 열일곱 살, 잠깐 뒤돌면 훌쩍 큰 아이가 자기를 반기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저와 비슷한 키였던 공진은, 어느 새 올려봐야 할 정도로 자랐다. 아까 본 바지 밑단도 복사뼈에서 한참 껑충 올라와 있었다. 그런 주제에, 양말만은 늘 위태로웠다. 푹 젖은 하얀 교복이 선명했다. 하얀 반팔 셔츠, 니트와 비슷한 색인 군청색 면바지. 세탁기에서 꺼내 거실에 널어둔 교복이, 돌석의 마음에 아프게 박혔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보기 시작했다. 오십오, 십칠... 서른여덟. 삼십 년 하고도 팔 년이나 어렸다. 돌석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서른여덟, 두 번째 시집을 썼던 때, 그때 공진은 태어났으리라.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공진이 멋쩍게 나왔다. 돌석의 티와 바지를 입고 나온 공진은, 말없이 의자에 앉아 구급상자를 뒤적였다. 까지고 멍든 곳에 약을 바르고, 거즈를 대는 솜씨가 능숙했다.

 

아빠가요.”

“...”

편지, 그래서 못 썼어요.”

내가 보냈으니까 괜찮아.”

오지 말라고 하셔서, 안 갔어요.”

“...”

그래서, 선생님 집 앞에 있다 갔어요.”

“...”

커튼 때문에 잘 안 보였는데, 선생님 그림자 보이면 가구, 또 불 꺼진 날에는 위층 보다가 집에 들어가구.”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공진이 씩 웃었다. 입술 한 쪽이 터진 웃음이었지만, 예전과 놀랄 만큼 똑같았다.

 

선생님, 저 여기 있다 가면 안 돼요?”

 

돌석은 대답 대신 애꿎은 홍차만 들이켰다. 공진은 구급상자를 대강 정리하고 일어났다.

 

선생님, 저는요. 제가 영원히 고등학생이었으면 좋겠어요.”


공진이 침대에 모로 누워 중얼거렸다. 돌석은 공진의 젖은 교복을 털다 슬쩍 시선을 돌렸다. 풀썩, 엎드린 공진이 돌석을 쳐다본다. 반만 빼꼼 나온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돌석이 헛기침을 했다. 탁자 위에 올린 손을 저도 모르게 꼭 쥐었다.

 

선생님 시 너무 좋아해요.”

그래, 그러니.”

도서실에서 맨날 읽었어요.”

“...”

그러다 연체된 적도 있었어요.”

“...”

그러면 도서위원이, 뭐라고 막 해요.”

“...”

집 근처 서점에 가두, 선생님 책만 찾아서 읽고...”

“...책은 다양하게 읽어야지.”

 

침대 아래로 팔을 내려트린 공진, 흰 시트에 노란 스탠드 불빛, 드리워진 그림자. 공진은 이곳에서 삼백 년 동안 뿌리를 박고 살아온 나무처럼 보였다. 돌석은 방으로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애꿎은 공진의 젖은 교복 깃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파란 명찰 위 하얀 글씨, 이 공진. 파란색 명찰은 아마 고등학교 1학년을 상징했을 것이다. 돌석은 파란색이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청춘, 푸른 봄. 공진의 언어는, 그만큼 맑았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져 유리창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공진의 머리카락 끝이 뽀송하게 마르고 있었다.

 

선생님, 창문 안 닦으셨네요.”

, 커튼을 걷은 지 얼마 안 돼서.”

선생님이랑 유리창 닦을 때 재밌었는데.”

 

돌석은 속마음을 들킨 듯 제 심장이 벌렁대는 것을 느꼈다. 공진이 손을 댔기 때문에 창문은 닦이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진실은 개수대로 빨려 들어간다. 공진이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선생님 집에 오면요, 포근해요.”

“...”

여기선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따뜻한 이불도 있고, 책도 많고, 선생님이 해주신 맛있는 것도 있고. 공진이 웃으며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바깥은 너무 무서운 것도 많고 걱정할 것도 많아요. 나도 선생님처럼 글자 속에서 살고 싶어요.

 

선생님이랑 같이요.”

 

돌석이 하얀 교복 깃에서 손을 떼고 공진을 바라봤다. 공진은 어느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돌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진에게서 빛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것이 하얀 시트와 하얀 티셔츠에 비친 불빛 탓인지, 아니면 그의 젊음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눈부신 만큼 위태로웠다. 젊음은 항상 위태로웠기 때문에. 공진이 돌석에게 다가오는지, 돌석이 공진에게 다가오는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공진이 눈을 휘어 접으며 웃었다.

 

, 선생님 사랑하는 것 같아요.”

 

돌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공진이 어느 순간 제 옆으로 온 지도 몰랐다. 홍차 냄새가 무심하게 진했다. 공진의 글쓰기를 평가하는 것처럼, 제 질투와 연정도 공진에게 이렇게 휘몰아치듯 확인받았다. 돌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과 돼, 이 두 글자만 입 밖으로 내면 되는데.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차마 내칠 수 없는 추접스러운 연정이었다.

 

“...안돼.”

왜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 사랑한다는데 왜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하세요?”

고등학생, 이잖니. ?”

제가 너무 어려서 그래요? 정말로, 제가 어려서, 많이 몰라서 그러세요?”

그래, 넌 열일곱이고, 나는, 쉰 하고도 다섯이니까.”

선생님은 제가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죠?”

 

공진이 무릎을 꿇고 돌석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손을 꼭 잡았다. 마주잡은 손이 뜨거웠다. 공진은 아픈 것이 맞았다. ‘뜨거워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열이 바이러스처럼 이곳저곳 전이되는 현상.’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라고 정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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