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tuuxnziJJS4&list=PLb8ovsbeJDahQ-CbA_jdZ49OHHhUeegbe&index=15






삼촌, 어디 가요.”

 

자성의 색 없는 목소리가 청의 뒤통수에 박혔다. 청이 천천히 뒤돌았다. 새벽녘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은 모든 것을 흐리게 만들었다. 자성이 모로 누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구 있어, 삼촌 다녀오께잉?”

어디요?”

느 모르는 데.”

말해줘요.”

말해줘도 모를거여.”

 

그래도 말해줘요. 자성이 손을 뻗어 청의 셔츠를 잡았다. 청이 씩 웃으며 자성의 손을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이내 잠그던 단추를 마저 잠그기 시작했다. 속옷도, 바지도 대충 껴입고서는. 청은 여전히 모를 사람이었다. 어젯밤 제 손을 끌고, 몸까지 섞었는데도. 청이 방문을 열었다. 자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삼촌.”

?”

“...아니에요.”

 

한 마디도 없이 다시 뒤돌아서 나가는 청, 그가 매일 어디 가는지 중구에게 몇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실실 웃는 얼굴과 함께. 청의 이야기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몸을 섞는다는 게, 이렇게나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새벽빛이 흐렸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자성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대충 면바지에 다리를 우겨넣고 청을 뒤따랐다.

 

삼촌.”

 

흰 자켓을 입은 청의 뒷모습이 저렇게나 선명한데, 어딘가로 증발해버릴 것 같았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위태로웠다. 청이 천천히 뒤돌았다.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녹아버려서 온 마룻바닥을 다 채웠다. 자성의 발목까지 차올랐다. 천천히, 하지만 빠지는 곳 없이 그의 눈동자가 차올랐다. 흐린 빛이 그것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들었다. 자성은 천천히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익사할 것 같았다. 청이 완전히 뒤돌아 자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성은 떨리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잡지 않았다. 자성의 숨이 풀린 건 바로 그때였다. 청의 표정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

 

자성이 목을 매만졌다. 눈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관에서 새나오는 빛만 가득했다. 떨리는 숨을 천천히 고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청은 다시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었다.


“...우산, 가져가요.”

 

할 말은 많았지만, 자성은 겨우 그 말만을 목구멍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청이 웃으며 삼단우산을 집어 들었다. 자성에게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한번 까딱한 검은 우산은 꼭 장례식에 간다는 무언의 표시 같았다. 자성은, 닫힌 현관문만 뚫어져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올 때까지.

그 이후로 자성의 눈동자는 청의 등 뒤에 항상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본 중구와 청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곤 했다.

 


 

토끼 다음은 들개였다.

갈대밭 맞은편, 야산에서 세 마리씩 무리지어 돌아다니던, 비쩍 마른 들개들을. 중구는 풀이 패인 곳을 보여줬다. 이게 동물들이 다니는 길이야. 그리고 검은 비닐봉투에서 피 뭉텅이를 주섬주섬 꺼냈다. 저번에 배를 갈랐던 토끼였다. 자성은 제가 버린 토끼의 태아를 살폈다. 여전했다. 손가락 마디만한 것들, 자성은 그것을 다시 비닐봉지에 던졌다. 무리 중 임신한 들개가 있었으면. 미끈한 손가락을 대충 코트에 문지르고 총을 고쳐 잡았다.

 

아무리 봄이라도 초봄이라 먹을 게 없었을 거다.”

 

그들이 가는 길가에 피가 덕지덕지 흐를 것이다. 굶주리고 포악한 들개들은, 비쩍 마른 뱃가죽을 채울만한 것들을 찾아 온 야산을 헤매고 다니겠지. 청둥오리를 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기다림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성은 중구를 올려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점을 노려보고 있었을 뿐. 쌍꺼풀 없이 길게 빠진 눈꼬리가 차갑게 빛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비쩍 마르고 흰 개 한 마리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중구의 눈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자성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급히 가져다 댔다. 하지만 중구가 손을 들어 막았다.

 

에헤이, 아직.”

왜요?”

한 마리밖에 없잖아. 분명 또 한 마리 올 거라고. 아니면 두 마리.”

 

흰 개가 그것의 냄새를 맡았다. 정말 중구의 말이 맞았다. 흰 개는 꼬리를 흔들었고, 이윽고 뒤쪽에서 흙빛 개 한 마리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등장했다. 중구가 자성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내 말이 맞지? 그러나 웃음은 짧았다.

 

네가 하얀 거, 내가 누런 거.”

제가 황구 쏠래요.”

 

뭐어, 마음대로 해라... 중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여간 새끼, 회장님 닮아서 고집도...”

 

자성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중구와 거의 비슷하게 쏴야 했다. 잠깐의 텀이라도 두면, 금방 도망칠 게 뻔했기 때문에. 숨을 들이쉬는 소리, 건너편 갈대밭에서 나는 갈대들의 합창.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적막을 찌르는 총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중구의 총알이 정확하게 흰 개의 이마를 관통했다. 흰 털이 금방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머리가 터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성은 이마를 쏘지 않았다. 이마 대신 배를 쏜 탓에 누런 개는 비틀거리며 필사적으로 도망갔다.

 

, 미쳤어? 내가 한 번에 죽이라고 했잖아.”

 

자성은 중구의 타박을 뒤로 하고 덤불에서 뛰쳐나왔다. 노란 털은, 죽은 풀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온 중구가 자성의 어께를 잡았지만 자성은 그 개가 간 길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마를 맞출 수 없어 맞추지 않은 게 아니다.

그 개는 새끼를 배고 있었다.

 

중구가 투덜거리며 흰 개를 확인했다. 머리가 아주 날아갔구만. 중구가 개의 뒷다리를 잡고 차로 끌고 갔다. 질질 끌리는 몸뚱이가 잘게 경련했다. 아직 살아있었다. 중구는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때마다 다리를 휙 잡아당겼다. 자성은 총을 들고 따라가면서 생각했다. 숨을 끊을 줄 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숨을 끊는 것, 내 숨도, 짐승의 숨도. 중구가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무성의하게 공구 상자를 던졌다. , 피 먼저 빼고 있어봐라. 그가 담배를 빼물었다. 그는 사냥한 것을 해체할 때 항상 담배를 피우곤 했다.

 

, 대가리가 날아가 버려서 가를 필요가 없겠네.”

 

아쉬운 대로 이렇게 하자. 중구가 개의 허벅다리에 날카로운 갈고리를 걸었다. 그리고 간이책상에 걸었다. 그 모양새가 꼭 정육점 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성이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은 아무 색도 없었다. 정말로.

 

비 올 거 같다. 빨리 하고 가자.”

 

중구가 자성에게 목장갑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입에 문 담배 때문에 더 뚱하게 들렸다. 다운자켓 모자에 붙어 있는 갈색 털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자성이, 거 좀 가르고 있어봐라. 중구가 주머니칼을 던졌다. 분홍색 배, 다른 개 같았으면 툭 튀어나왔을 텐데. 살짝만 칼을 대도 툭, 하고 터졌을 텐데. 자성이 견적을 잡는 듯 칼끝을 살짝 댔다. 푹 찌르고, 내장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며 자성이 청 생각을 했다. 제법 불어오는 바람에 불을 붙이던 중구가 그런 자성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토끼의 내장과 개의 내장은, 정말로 달랐다. 크기부터가 다르고, 이건 뭔지, 그리고 저건 뭔지. 목장갑은 영 불편했다. 불친절한 중구의 부름이 자성의 뒷덜미를 찔렀다. .

 

맨손으로 해.”

그래도 돼요?”

누가 뭐래, 하고 싶으면 하든가드러운 거 다 나오잖아.”

 

중구가 내장을 박박 긁어냈다. 자성은 한쪽 목장갑을 벗고는, 톱으로 갈비뼈를 썰기 시작했다. 텅 빈 개 뱃속이 허전했다. 자성은 아까 놓친 황구 생각을 했다. 찢어진 배에서는 피만 줄줄 새진 않겠지. 그 개, 배가 제법 불렀던데.

 

무슨 생각 해. 아까 놓친 거?”

“....”

놓친 건 그렇게 살다가 반병신으로 뒈지는거야. 피가 많이 나와서 죽거나, 감염돼가지고 온몸이 썩어서 뒤지거나.”

“...”

새끼 배고 있더라.”

“....”

일부로 쐈냐?”

“...”

 

자성은 아무 말 없이 허벅다리를 썰었다. 그 모습을 보던 중구가 비리게 웃었다. 덜컹 하고 간이 책상이 흔들렸다. 오른쪽 다리가 풀썩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친 새끼.”

 

웃음이 잔뜩 섞인 말이 톱처럼 저를 써는 것 같아 자성이 뒤돌았다. 중구는 의외로, 아주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배부른 포식자의 웃음이었다. 자성은 다시 왼쪽 다리에 톱을 댔다. 중구의 웃음이, 새끼를 밴 개보다 더 생각날 것 같았다.

 

오늘은 이쯤 하고 가지.”

아직 다 안끝났는데...”

 

자성이 아쉬운 듯 톱을 멈췄다. 중구가 목장갑을 벗으며 웃었다. 그리고 자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성은 처음 중구와 사냥 간 날을 생각했다. 우리는 공범자라고 그랬었지. 귀 언저리에 바로 작게 들려오는 중구의 목소리가, 정말로 큰일을 끝낸 패거리 같았다.

 

그건 그쯤 하고 버려.”

 

삼촌이, 그 놓친 개 찾아줄게. 귓가에 스치는 속삭임이 달았다. 자성이 중구를 쳐다봤다. 아까 봤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자성이 금방이라도 톱을 떨어트릴 것 같았다. 공범자, 패거리, 그리고 중구 삼촌. 자성이 트렁크를 뒤지는 중구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덜렁덜렁 간신히 몸뚱이에 붙어 있는 흰 털의 허벅지를 봤다. 자성은 거기에 박힌 갈고리를 표정 없는 눈으로 뺐다. 한참 트렁크를 뒤지다 중구가 몸을 일으키며 욕을 마구 내뱉었다.

 

에이, 씨발 니미...”

왜요?”

물이 없어. 수건도 없고.”

 

피투성이 공구들을 공구함에 마구 집어넣은 중구는 목장갑으로 대충 손의 핏기를 닦았다. 자성의 손에서도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피투성이 손으로 운전을 하는 중구를 보고, 자성은 뒷자리에서 빙긋 웃었다. 기어도, 핸들도 모두 붉었다.

 

중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 적신 수건으로 핸들이고 기어고 손잡이고 모두 닦기 시작했다. 바싹 마른 피는 손을 댈 때마다 가루가 되어 온 사방천지를 다 더럽히기 때문이었다. 자성은 가만히 뒷문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선 청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박자도 없고, 음도 없었다. 그저 손 가는대로 치는 것 같았다. 자성은 그 뒤로 다가갔다. 소리 없이 놀라는 청을 제 피투성이 두 팔로 가둔 자성은 천천히 그를 따라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하얀 건반이 붉게 물들었다. 자성은 하얀 털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렸다. 가볍게,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게 털 사이로 스며드는 붉고 따끈한 피. 자성은 청의 옆에 앉았다. 머뭇거리다 그가 손댔던 그 자리를, 청이 따라간다. 그의 손가락도 붉은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검고 매끈한 피아노에 비친 청의 얼굴을, 자성이 응시한다. 그의 손가락이 붉게 변한 게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손은, 원래부터 붉지 않았을까. 원래부터 붉었던 그 손가락은, 나로 하여금 조금 더 붉어진 게 아닐까. 그는 자성을 쳐다보지 않았다. 지저분한 피때가 붙어있는 건반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네 손이 치는 피아노 또한, 보라색 소파처럼 처음이었다. 피아노 소리가 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뱉는 숨소리는 선명했다. 귀가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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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uferstehung




그러나 사랑은 저택을 세운다. 배설물의 장소에. - 예이츠, 미친 제인이 주교에게 말한다.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오만을 말할 때 흔히 바벨탑의 예시를 들곤 한다. 하지만 열여덟 살 이자성은, 절대 그 비유가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자성은 절대 오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욕망이 없는 사람 또한 아니었다. 한계의 상징, 바벨탑은 그런 것이었다. 바빌론 사람들에게 어떤 경고가 내려졌었는가? 절대 아니었다. 신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한계를 향해 나아간 것뿐이었고, 자연스레 권력을 욕망하게 된 것이다. 서재에 먼지가 가득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몇 주간 서재에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커튼을 거친 노르스름한 빛이 은은하게 쏟아졌다. 계절이 바뀐 책들은 이제 전부 자성의 손에 들어왔다. 자성이 조심스레 커튼을 치고 육중한 창문을 밀었다. 흰 창문의 창틀은 여전했다. 봄이 맑았고, 아버지가 죽은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상쾌했다.

아버지는 회장이었고, 뿌린 씨가 많았다. 자성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자성의 어머니였다. 가장 아끼는 여자의 아이는 자성이었고, 그는 자연스레 그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많았을 텐데. 자성은 항상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지켜보곤 했다. 서재는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고, 성스러운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자성은 절대 그 자리로 올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사람 또한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자성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자성은, 만 열 살의 이자성은 서재를 가지고 싶었다. 아버지만 없으면, 서재에 마음껏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문 밖으로 흐르는 빛줄기를 보며 자성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기까지는 십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교통사고, 즉사였다. 별로 슬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이제 모두 사라졌으니, 서재뿐만 아니라 그 큰 이층집이 모두 자성의 것이 되는 것이었다. 아쉽다, 내가 어른이었으면 당당하게 이 집을 혼자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자성이 검은 양목을 매만졌다. 화려한 거울 속 제 흑백 모습이 차가웠다.

바람이 차다, 상주는 너무 많았다. 자성은 부러 완장을 차지 않았다. 화려한 꽃들, 진한 향의 냄새. 와글거리는 사람들. 노란 잔디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아버지처럼, 자성은 애꿎은 잔디를 발로 찼다. 단정한 이마를 꽃샘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무리들, 또 하얀 무리들. 자성은 그들 사이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눈에 띄는 두 사람, 혹은 무리. 그들은 희미했지만 선명하게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남자와 그 옆의 또 다른 한 남자. 그들은 분명 귀엣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소근거리는 소리가 자성의 귓가에 바로 들리는 것 같았다. 자성은 천천히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미묘한 기분, 자성은 알고 있었다. 저 무리만의 세계 가 존재했고,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상주-와 한 줄짜리 완장들에게 방해받았고, 자성은 그새 사라진 그들을 생각했다.

긴 장례식이 끝났다. 방으로 향하는 계단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서재로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자성은 그 고단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쓰러졌다. 하얀 시트는, 여전했다. 초봄이었다. 아무것도 나지 않는 시기. 제 손에 걸린 검은 넥타이를 보다 결국 까무룩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남자들은 아무래도 꿈에 나오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아주 오랜만에 꿈까지 생략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나도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초봄은 아무 것도 없는 계절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도, 없다. 아버지의 자리를 모두 갉아 먹을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하얀 벽돌로 된 이층집. 그곳을 자성은 사랑했다. 하얀 아치의 대문을 열면, 넓은 마당이 보이고, 젊고 두꺼운 나무에 그네가 달려있고, 현관을 열면 나무 마룻바닥이 보이는. 좁지만 급하지 않은 계단은 어린 자성의 책상이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바로 앞에 보이는 문을 열면, 자성이 그토록 원했던 서재가 나온다. 빨간 카펫에 상아색 커튼, 원목 책상. 전 우주의 비밀이 이곳에 다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서재를 나와 복도를 따라가면, 창문 옆 작은 방이 자성의 방이었다. 원래는 더 넓은 방이었지만, 경사진 천장이 좋았기 때문에 자성은 종종 이곳을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자성의 그 방 바로 아래에는 부엌이 있었다. 온통 하얀 부엌. 아름다웠다. 따뜻한 질감의 집과는 달리 부엌만은 너무나도 차갑고 이질적이었다. 냉장고에는, 계란 몇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정란, 영원히 부화하지 못하는 병아리들. 부엌을 다시 나와 몇 발자국 더 걷다 보면, 거실엔 피아노가 검고 큰 짐승처럼 엎드려 있다. 자성의 온실, 그의 모든 공간들.

장례식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요란한 방문이 이어졌다. 간을 보려는 듯 잠시 뜸만 들이다 간 남자, 자성은 그를 기억했다. 상주였다. 자성이 혹시 제 자리를 넘보고 있을까봐, 그것이 두려워 그는 자성에게 온 것이다. 자성은 발톱을 숨기고 있는, 아니, 제 발톱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자였다. 그는 영리하고 힘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겐 없는 기민함이 그에겐 있었다. 발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자가, 계속 발톱을 집어넣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발톱을 빼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 발톱을 빼는 순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발톱의 존재를 알아차릴 테니까. 사자가 그것을 쓰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이자성은 백지나 다름없었다. 자성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그들을 대했다. 서재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딱히 야망이랄 것도 없는데. 하지만 오랜만에 들어선 서재의 초라함에 자성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상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서재. 온 우주의 지식이 이곳에 있을 줄 알았다. 자성의 이갈이가 시작되었다. 상상도 못할 만큼 두껍고 날카로운 이가 점점 자라고 있었다.

기회는 복사뼈에 날개가 달린 여신처럼 찾아왔다. 자기네들을 삼촌이라고 부르며 집에 그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자성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키 큰 남자는 이중구였고, 그 옆의 남자는 정청이라고 했다. 미묘한 예감이 들었다. 삼촌들의 등장은, 분명 자성의 인생을 바꿀 어느 한 사건이 될 것이 분명했다. 청은 자성을 만나자마자 제법 살갑게 굴었다. 나이가 몇이며, 학교는 다니고 있느냐, 이 큰 집에서 혼자 어떻게 사느냐... 짙은 와인색 소파에 둘이 앉은 건 분명 처음이었다. 자성은 작게 웃으며 청과 대화를 계속했다. 그러다 힐끔 훔쳐본 중구는, 냉랭한 얼굴로 뒤에서 바라 볼 뿐이었다. 하지만 자성은 알 수 있었다. 그 둘만의 세계에 자신도 들어왔다는 것을. 자성은 중구를 쳐다봤다. 중구 또한 그와 눈을 맞췄다. 냄새를 맡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자성은 다시 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글라스에 한 번 가려진 눈동자는 영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중구는 자성에게 죽이는 법을 알려줬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법이었다. 사냥용 총을 들고 사냥을 나간다거나, 그 잡은 것들의 내장을 갈쳐놓는다거나 그런 일들을 함께 했다. 자성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볼 때마다 놀랍다고 생각했다. 난생 처음 보는 피는 아니었지만 동물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따끈한 피가 흐른다는 것을 그는 그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몇 번 나간 적은 있지만 이렇게 그것들의 배를 가른 적은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청둥오리 다섯 마리, 자성은 눈을 감았지만 중구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들의 목을 따 피를 빼냈다. 그리고 칼을 꺼내 천천히 배를 갈랐다. 아직 따뜻한 내장과 피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았다.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자성이 물었다. 중구는 귀찮아하면서도 이건 소장, 이건 간, 이건 심장이라고 친절하게 답했다. , 이제 너 혼자 해봐. 자성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내장을 빼내던 중구가 제 손을 거뒀다. 자성은 입술을 깨물고 오리 배에서 나온 창자를 잡아당겼다. 자성의 하얀 셔츠에 피가 튀겼다. 피가 범벅인 손은 끈적이고 미끈했다. 자성은 정신없이 텅 빈 배의 갈비뼈를 쥐었다. 십오 분 전까지만 해도 두근대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신없이 봄을 맞아 먹어댔을 녀석이었다. 미끄러운 내장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순간 중구가 자성의 어께를 잡았다. .

 

그렇게 세게 하면 안 돼. 다 터지잖냐.”

 

중구가 자성의 손을 다시 잡았다. 물 한 병을 따 자성의 손에 흥건한 피를 닦는다. 자성은 그것을 멍하니 쳐다본다. 중구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우리는 공범자야, 알았지. 공범자, 마음에 드는 단어였다. 자성은 알았노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중구의 차에 올라탔다. 갈대가 모든 것을 다 듣고 있었지만, 그들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바람이 상쾌했다. 셔츠에 튀긴 피가, 미끄덩한 창자의 촉감을 증명하고 있었다. 중구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자성은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 죽음이란 건, 말이 없는 법이었기에. 그 이후로 자성은 중구와 제법 친근하게 지냈다. 청둥오리 다음엔 거위, 다음엔 토끼였다. 가죽을 벗기고, 새빨간 고깃덩어리에서 내장을 꺼낸다.

 

삼촌, 이게 뭐에요?”

그거? 새끼.”

 

자성이 토끼 배에서 작은 핏덩이들을 꺼냈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빨간 덩어리가, 이 토끼의 아이였다. 자성은 냉장고 속 차갑게 남겨진 무정란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창자 덩어리 사이로 던졌다. 중구가 담배연기를 하얗게 뿜었다. 연기만큼 새하얀 담배 필터는, 토끼 피로 지저분하게 번졌다. 자성은 이제, 중구의 손이 없어도 내장을 손질할 수 있었다. 잘 하는데. 중구가 씩 웃으며 자성의 어께를 툭툭 쳤다. 그가 가만히 웃었다.

 

다음엔 좀 더 큰 걸로 하자.”

 

그 배에는, 새끼가 있을까. 중구가 건넨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자성은 가만히 생각했다. 중구가 짧아질 대로 짧아진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던졌다. 새빨갰다.

 

청은 자성에게 딱히 무언가를 가르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저 어른들의 일, 운전이나, 이 술이 무슨 맛이 나는지, 무엇과 먹으면 좋은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몇 가지 보여준 게 다였다. 그러다 자성은 보게 된다. 중구와 청의 정사를, 그리고 청의 연갈색 눈을. 빨간 카펫에 누워있던 청, 그리고 그 위로 우악스럽게 움직이는 중구. 아버지의 서재였다. 자성은 홀린 듯 열린 문 틈 사이로 다가갔다. 중구가 청을 찔렀기 때문에 바닥이 온통 새빨간 것처럼 보였다. 청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성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청의 그 두 눈동자는, 자성의 얼굴에 박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이 맥없이 흔들렸다. 중구는 그의 턱을 포악스레 잡고 입 맞췄다. 그것을 입맞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성은 멍하니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두 발은 떨어지지 않았고, 목울대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생생했다. 찌걱대는 소리, 노골적인 신음 소리, 삼류 포르노였다. 자성의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열여덟 살, 죽음과 섹스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자성은 그 이후 청과 중구의 모든 행동을 바라봤다. 증오하지만, 무심하지만 성적인 마주침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청에게 귓속말을 하다 귓바퀴를 깨무는 중구, 저녁 식사 시간 중구의 허벅지를 쓸어 올리는 청, 중구가 커피잔을 잡고 있을 때 그의 손목을 잡는 청.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 한 편의 영화였다.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이질적인 부엌에서, 청이 자성의 앞에 앉아있었다. 실없는 장난과 농담들이 머릿속을 그냥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달싹대던 자성의 입술은 결국 제 목소리를 만나고야 말았다.

 

, 삼촌.”

왜 그려?”

그때, . 서재에서.”

방에서 무얼?”

, 중구 삼촌이랑...”

으잉? 쭝구랑 뭐?”

 

청이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순간 자성이 청의 손목을 잡았다.

 

삼촌. 나는, 안돼요?”

뭐이? 뭐가?”

나도 할래요.”

 

자성은 제 새까만 눈동자를 치켜뜨고 청을 바라봤다. 언제 왔는지 중구가 청 뒤에 서 있었다. 청은 중구를 뒤돌아보며 씩 웃었다. 중구는 눈썹을 으쓱 하며 턱짓으로 자성을 가리켰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쩔 건데?”

중구가 이죽이며 웃었다. 청이 뭐라고 한 소리 하기도 전에 자성이 끼어들었다.

 

중구 삼촌은 되는데, 왜 난 안 돼요?”

 

그때서야 청이 큰 소리로 웃었다. 중구도 입꼬리를 당겨 웃고는, 알아서 해보라는 듯 하얀 커피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청은 눈가를 훔치며, 자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 나랑 거하게 한 판 뜨고 싶다- 이 말여?”

 

자성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입술을 꼭 깨물고 청을 쳐다봤다. . 대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청을 잡은 자성의 손바닥에서 땀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자성의 손목을 가만히 쓸었다.

 

쭝구랑 사냥 간 적 있냐잉.”

.”

어떻드나.”

“...”

좋았드냐?”

.”

그럼 됐다, 가자.”

 

청이 먼저 일어났고, 자성은 그 뒤를 따랐다. 요란한 발소리가 층계를 타고 올랐다. 중구가 제 입에 댔던 커피잔을 천천히 내렸다. 싱크대에 기댔던 몸을 바로 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마도, 자성의 방은 부엌 바로 위일 것이다.

자성은 제 방으로 청을 데려갔고, 그는 여유롭게 자성의 침대에 앉아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야아, 우우리 자성이 방이 이렇게 생겨먹었었고만? 어느 새 자성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문을 닫는 소리가 파랗다. 하얀 창문 문틀을 타고, 희미한 빛이 샜다. 자성은 조금 망설이는 것이 분명했다. 먼저 입을 맞춘 것은 청이었다. 풍선이 터지는 데에는 큰 게 필요가 없지, 작은 바늘 하나면 충분했다. 마주친 입술이 뜨거웠다. 자성에게 밀려 뒷걸음치던 청이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자성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자성이 그걸 내려다보고.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몸과 몸이 겹치고, 자성은 토끼의 내장을 빼는 상상을 했다. 처음 청둥오리를 죽인 날 입었던 셔츠였다. 자성이 청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눈이 마주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자성이 급하게 청의 손을 붙들었다. 깍지 낀 손이 위태로웠다.

어느새 소리 없이 중구가 들어와 의자에 앉아 그들을 보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은 중구의 표정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자성은 제 아래에서 바르작대는 청의 얼굴을 쓰다듬다, 천천히 중구 쪽을 항해 돌렸다. 순간 그들의 눈동자에 놀람이 스쳐지나갔지만 중구는 팔짱을 꼈고, 청은 다시금 인상을 썼다. 자성이 예고 없이 치고 올라왔기 때문에. 세 사람의 밤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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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uferstehung

자성태일 박쥐 AU떡설.. 보고싶당 하지만 박쥐 에유가 아니라 그냥 뱀푸 AU겠지.. .

음 뭔가 엄청 오래 산 자성이가 보고싶다 그리고 선님이랑 푼 썰도 보고앂다! 




조영욱 - 귀여운 뱀파이어 https://www.youtube.com/watch?v=WKS8RD-PGp4&list=PLb8ovsbeJDahQ-CbA_jdZ49OHHhUeegbe&index=12



연리목 - 보고야 말다 https://www.youtube.com/watch?v=peZk5vPJ8kM (응교 오스트 







 

너무나 오래 살았다, 이것은 이자성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었다. 자성은 정말로, 너무 오래 살았다. 사람들이 생각도 못 할 만큼. 이백 오십 번째 겨울을 세다 그만 둘 정도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사람들은 늙어 가지만, 이자성은 여전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지긋지긋한 삶을 저주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평생 아무에게도 마음을 준 적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 산데다가, 태생부터 사람을 잘 믿지 않았던 자성은 누군가를 옆에 두는 법이 없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사람들이 한결같은 경우는 없었다. 그에게 접근한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자성은 덕분에 배고프지 않았다. 허기를 그들로 채웠기 때문이다. 슬프고, 외롭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래 살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낙엽들에 불과했다. 인연 같은 것은 너무 하찮았고, 운명 같은 것은 너무 가혹했다. 사는 것은 너무나 지루했기 때문에 자성은 삶의 최전방, 피가 흩날리고 창자가 날아다니는 곳을 선택했다. 삶에 치열해져 보기 위해. 쌈박질을, 주먹질을 하는 곳은 언제나 움직이는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정 청을 만났다. 청도 그에겐 처음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매몰차게 내치지도 않았다. 여수에서 청과 살 부대끼며 살던 시간들은 자성이 꼽는 몇 안 되는 즐거운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달이 정말로 크게 뜬 날 밤, 여수 항구에서 자성은 그만 청에게 제 마음을 줘 버리고 말았다. 낙엽 같았던 사람들이, 낙엽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자성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었다. 남들보다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청의 야망에 자신의 시간을 합하면, 청이 원하는 것을 이뤄줄 수 있었다. 자성은 그날부로 청을 따라 목포로, 군산으로, 서천으로, 마지막으로 인천으로 갔다. 청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자성도 기뻤고, 청이 어느 날 다쳐 돌아오면 자성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청이 맞을 칼을 제가 대신 맞아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청은 몇 번이고 자성을 제 등 뒤로 숨겼다.

 

형님.”

“...”

아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구요. 조심 좀 해요.”

씨빠, 좆겉은 소리 하긴... 니가 죽냐? 내가 죽지, 이 씨봉새끼야.”

 

자성의 첫 번째 관계는, 청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법,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 알에서 태어난 것들의 각인처럼 자성은 청을 그렇게 생각했다. 자성에게 있어 죽음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허기를 못 참고 청의 손목을 저도 모르게 물었던 때, 그리고 모든 사실을 청에게 말해버렸을 때. 청은 영원히 살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열심히 청의 손목을 빨면서도 자성은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다. 왜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걸까? 피가 빨려 들어가듯, 그 의문 또한 어딘가의 수챗구멍으로 빠지고 말았다. 자성은 순간 여수를 생각했다. 아마- 죽지 못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있어 저주가 아닐까? 갑자기 너무나 오래 산 자신이 징그러운 존재처럼 생각됐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늙고 싶다, 청과 함께. 피와 창자가 떨어지는 공간 속, 자성은 갑자기 모든 행동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청의 장례식을 보면 어떡하지? 그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칼들이 이자성을 향했다. 깜빡,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자성은 청의 장례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자성은 인정하기로 했다. 청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 또한 사라진다는 것을. 자성은 애초부터 정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어짐 또한 몰랐다. 새하얀 병실에서 눈을 다시 뜬 그날, 또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를 걱정스럽게 타박하는 청의 목소리에 자성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헤어짐은 무너짐과 같은 말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날은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독하게 살어, 그래야 네가 살어. 바스스 부서진 말들은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처음 겪는 이별은 절대로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자성은 처음으로 사람 때문에 울었다.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누군가를 마음 한 구석에 내준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청의 시체를 밟고 회장 자리에까지 오른 자성에게 의미 있는 것은 이제 하나도 없었다. 목숨 값은 너무나 저렴했다. 자성이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시간들이 남들보다 더 빨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청의 1년 또한 자성의 1년이었고, 그 시간은 한순간이라도 허투루 간 적이 없었다. 자성은 골드문 회장 자리를 내려놓고 어딘가로 떠났다. 자신이 죽지 못 하는 것은 저주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자신과 같이 끝까지, 영원히 살자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은 결국 파멸이라고 생각했다. 사경을 헤매는 청 앞에서, 청이 죽기 그 직전까지도 너무나 고민하다 결국 주지 못했다. 그런 자신이 한심할 법도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기껏해야 몇 백 년 더 살고서는, 지루하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다 자기가 있는 방의 벽을 손톱으로 긁을 뿐이었다. 그 짓을 청에게 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이 죽은 것은 너무나도 억울했다. 태어나서부터, 가장 오랜 기억에서부터 자성은 추억 속에서 살고 있었다. 영원히 사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를 과거에 묶이게 했다. 자성은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골드문 회장직을 내려놓고 자성은 청과 함께 했던 곳들을 찾아갔다. 바다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다. 서천에서 군산으로 간 후, 군산에서 목포로, 마지막 종착지는 여수였다. 하지만 그는 목포로 내려갈 수 없었다. 벚꽃이 상상도 못 할 만큼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 월명공원에서 넘어온 벚꽃잎들이 바다에 하나 둘 떨어졌다. 군산에서 살 때 자주 가던 해망동은 예전과 다를 게 하나 없었고, 이자성은 한태일을 만났다. 반쪽짜리 만남이었지만, 무너짐을 복구하기엔 충분했다. 얼굴은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름 알아서 뭣에 쓰게요.”

, 아는 사람 같아서요.”

태일이요, 한태일. 누구랑 닮았는가?”

그냥, 아는 형님이랑...”

 

자성은 그때부터 태일을 눈으로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퇴근하고, 출근하고, 가끔 근처로 수금 나가는 한태일을. 자성에게 남는 건, 시간뿐이었다. 게다가 날씨도 좋았다. 예전 군산에 있을 땐 몰랐는데, 알고 보니 벚꽃이 사방천지다. 매일 밤 부둣가에서 싸움이나 하다가, 낮이 되면 푸지게 자는 생활을 해서 그랬을까? 자성은 또 청 생각에 코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날씨만 좋았다. 자성은 멍하니 바다를 쳐다봤다. 뒤쪽 월명산에서 날아오는 꽃잎이 간지러웠다. 담배를 하나 빼물던 찰나에, 공판장에서 익숙한 걸음걸이가 보였다.

 

, 태일 씨. 여기서 다 보네. 퇴근해요?”

... 자성 씨 아뇨? 뭔 일이셔?”

퇴근하셨어요?

예에, 오늘은 다 돌았는디. 그쪽은?”

 

저야 남는 게 시간이죠, 자성이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청과 다른 미묘한 기분에 자성이 태일을 바라보지 않은 시간이 거의 없었다. 청과 나이가 비슷한데도, 태일은 조금 더 투박했고 서툴렀다. 자성은 또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무너짐은 너무나 쉬운 현상이었다. 어느 날은 잘 아는 분식집으로, 또 엄청 매운 중국집으로, 달달한 빵집으로, 그리고 또 그만큼 순진했다. 벚꽃이 다 지던 날 자성이 먼저 내민 손에 답하듯 내민 것도 태일이었고, 그 손을 보고 감동받은 듯 환하게 웃으며 쳐다보는 자성을 보고 또 얼굴이 빨개져 투덜거린 것도 태일이었다. 반쪽짜리 만남, 반쪽이라도 좋았다. 비행장이 있었던 탓에, 군산에는 유난히 비행기가 많이 지나간다. 머리 위 구름을 반으로 가르는,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동백꽃은 없었지만, 여수는 아무래도 좋았다. 자성은 잡은 손을 꼭 쥐었다. , 사랑에 빠지자. 헤어짐은 그저 헤어짐에 불과했다.

 

 

 

 

태일의 병을 알게 된 것은 3달 전이었다. 자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청처럼 태일도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태일은 자꾸 제 병을 숨기려 들었다. 고칠 수도 없다는데 이대로 살다 죽을 거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했다. 속상한 마음에 자성은 눈을 내리깔았다. 태일 씨. 축 쳐진 자성의 부름에 태일은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아 자성은 가만히 웃었다.

 

태일 씨는 영원히 산다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영원히 사는 거,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는 태일의 대답에 자성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복잡한 마음이 속에서 들끓었다. 청처럼 태일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과, 또 정말로 영원히 사는 것이 축복인지. 청에겐 제 피를 주지 못했다. 청이 거절했기 때문에. 하지만 태일은? 태일은 영원히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자성은 저도 모르게 태일의 손을 꽉 잡았다. 욕심에 눈이 먼 것 같았다.

 

, 거이, 자성씨, 이것 손 좀...”

..., 미안해요.”

 

자성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뺐다. 연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빠져 죽을 수 있다면, 저 맑은 진흙탕에 익사할 수만 있다면. 자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다 가만히 잡은 손에 입 맞췄다.

 

 

 

태일은 마지막을 깔끔하게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며 몇 가지 파일을 공판장에서 가져왔다. 병원 침대는 둘이 앉기 충분했기에, 자성은 뒤에 앉아태일을 안고 팔랑팔랑 넘어가는 종이쪽만 무심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성의 숨소리가 태일을 성가시게 하는 일은 몇 번 있었지만, 그도 예전에 일을 했기에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진 않았다. 그러다 자성은 익숙한 단어를 보고 숨을 멈췄다. 골드문이었다.

 

태일 씨, 잠깐만요.”

 

자성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서울... 재범파, 북대문파, 집결. 날짜 또한 그 날이었다. 무미건조한 서류는 작정한 듯 퍼즐처럼 정보를 쪼갰다. 하지만 자성은 알 수 있었다. 재범파와 연이 닿은 군산 사무실 모든 인원이, 북대문파 정청을 죽이려 작정한 그 날 모두 집결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인원 중 한태일도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자성은 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설마. 한태일이 정청을 죽인 사람이 아닐까? 그때 보고는 분명히, 재범파가 아닌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자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시, 인연은 너무 하찮았고 운명은 너무 가혹했다. 마지막으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하기엔 너무나도 슬펐다. 자성은 천천히 태일을 돌아봤다.

 

태일 씨, 나 뭐 물어볼 거 있는데.”

뭐요?”

서울, 간 적 있어요?”

... 몇 번 가봤지. 근데 왜 그려요.”

 

그냥... 궁금해서. 자성이 태일의 어께에 얼굴을 묻었다. 화창한 날씨는 이제 없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지는 시간이다. 암흑으로 모든 게 물든다. , 반쪽짜리 만남이여. 자성의 손이 태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태일은 항상, 먼저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청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자성은 어느 순간 태일에게서 청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이야말로 서로를 갉아먹는 일 아닌가? 자성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너무나 오래 살았다고.

 

사람 찌른 적 많죠?”

그런 건 왜...”

대답해요. 서울 가서 사람 찌른 적 있죠?”

 

태일은 말이 없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만은, 자성은 태일의 어께를 힘줘 잡았다. 말해 줘요, 태일 씨. 태일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은 어느새 내려가 그의 목덜미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다. 태일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가고, 어느 순간 가로등이 팟, 켜졌다. 병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은, 이 모든 일의 목격자였다. 태일은 눈을 꼭 감았다. 너무나 노골적인 질문에, 제 창자가 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성의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고, 태일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노라 대답했다.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칼이 난무하고 피가 튀기는 그 장면을. 태일은 눈 뒤에서 끄집어냈다. 변명할 생각은 없었지만,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도 살겠다고, 그 많은 사람들이 지하주차장에서 서로 찌르고 갈퀴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와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씨발, 그 새끼 잡으라는 호통에 바로잡은 칼은 자꾸만 땀에 미끄러졌고, 흉흉한 그 눈빛에 입술이 저렸다고. 선글라스 뒤에 있어도 저와 똑같이 생긴 연갈색 눈동자는 자꾸만 태일을 찌르는 듯 했다. 엉겁결에 든 칼은 그의 옆구리를 찔렀고, 곧이어 뒤에서 들어온 칼이 반대쪽 옆구리를 찔렀다는 것. 그렇게 저 때문에 중심을 잃고 끌려간 그 남자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다신 볼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모든 일을 이야기하는 태일의 모습에 자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하주차장의 눅눅한 공기가 방을 감돌았다. 자성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태일의 어께에 얼굴을 묻었다. 태일이 청을 죽인 거나 다름이 없었다. 역시 청을 보내고, 울면서 했던 그 다짐이 맞았다. 다시는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한 그 다짐을. 슬픔이 분노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분노는 머릿속을 백야로 만든다. 하얘진 머릿속, 모든 것이 점멸했다. 자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일 씨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네요.”

 

태일이 당황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자성은 그를 잡아 눌렀다. 흰 시트가 눈이 부셨다. 태일의 얼굴 위로 자성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성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오고, 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시트 위로 눈물과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피 빨리는 느낌이 너무나도 선연했기 때문에, 그 이상한 느낌에 태일은 두려웠다.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소리 지르는 태일의 목소리는 자성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피와 눈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꼴딱, 목구멍으로 피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배려라곤 하나도 없는 몸짓이었다. 자성은 작정한 듯 짓이겨질 정도로 피부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주제에, 괜찮다는 듯, 달래는 듯 자성은 태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감히 할 수 없었다.

 

, , 미안, 잘못...잘못했, 흐으.....”

 

자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가가 새빨갰다. 태일은 자성이 얼굴을 떼자마자 급히 피가 흐르다 못해 토하는 곳을 꾹 눌렀지만 입이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성은 그런 태일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태일이 손사래를 치며 버둥거려도 자성은 푹 내려앉은 눈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뭐 잘못했는지 압니까?”

 

목이 막혀 헥헥대는 태일에게 자성은 알 수 없음, 두려움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되었다. 자성의 표정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다가오는 입술도 이젠 두려웠다. 입술을 전부 뜯어버릴 것 같은 입맞춤, 목에서 분출되는 피도 모자라 입술에서도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 듯 자성은 이제 귀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태일의 이는 이제 하얀 부분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비린내가 온 세상에 진동하는 것 같았다. 거친 숨소리가 태일의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그것도 잠시, 귓불을 물고 있던 이는 우악스러운 짐승의 이로 변해 귀 전체를 자근자근 씹기 시작했다.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귀가 반으로 접히는 기분, 거친 숨소리 사이에 섞인 원망의 말들. 목을 조르는 데에는 한 손만 있어도 충분했다는 것을 그때 태일은 기억했다. 상어 이처럼 날카로운 이빨들, 자성은 절대 태일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절대로, 그리고 영원히 자신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가 흥건했다. 자성이 제 손목을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하얀 손목 위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 같았다. 자성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포기 반, 원망 반이 섞인 눈은 결연해보이기까지 했다.

 

마셔요.”

 

움직일 생각을 않는 태일에게 자성은 제 손목을 들이댔고, 그의 입술에 진득하게 비볐다. 마시라니까요. 그가 태일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젖혔다. 무방비하게 벌려진 태일의 입술 위로 피가 뚝뚝 흐르는 제 손목을 가져다 대는 자성은 다시 한 번 태일의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태일의 손이 급하게 침대를 쳤지만 기어이 꼴깍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성은 제 손을 치웠다. 하얀 시트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자성이 우악스럽게 태일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단추가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평생 이것만을 바랐다는 듯 그가 태일의 허리를 꼭 끌어당겨 안았다. 어느 부분이든 다 좋았다, 이를 깊게 박을 수 있는 곳이라면. 눈물, , , 피부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나오는 것 같았다. 태일의 온 몸이 끈적거렸다. 자성은 고개를 숙이고, 꼭 눈물이라도 한 바가지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태일의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댔다.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제 손이 있던 자리를 지긋이, 몇 번이고 새빨간 혀로 쓴다. 신성한 의식의 마지막은 제물이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자성이 이를 세웠다. 태일이 찢어진 목으로 비명을 지르지만 그것은 자성에게 들리지 않는다. 목에서 흐른 피가 선을 타고 내려와 배꼽에 고였다. 혀는 그것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욕정하듯 움직였다. 창문을 타고 넘어온 노르스름한 가로등 빛이 곧은 자성의 이마를 비췄다. 태일의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쏟아진다. 배 언저리에서 놀던 자성의 혀가 다시 태일의 입술로 올라왔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맞춤이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이는 이미 찢어진 태일의 입술을 다시 헤집는다. 자성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태일은 무책임하게 긴 그의 손가락이 제 얼굴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 상황에서마저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속눈썹은 여전히 길었다. 모든 게 여전했다. 땅을 치고 울고 싶은 건 자신인데, 어째서 자성의 볼을 따라 길게 눈물 그림자가 늘어지는지 태일은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밭은 신음이, 훌쩍이는 소리가,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자성의 손목에선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태일은 쥘 것 없는 하얀 침대에서 속절없이 주먹만 꼭 쥐고 있었다. 자성은 그런 태일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의 손가락을 이로 살짝 긁다, 손바닥을 핥았다. 천천히 자성이 눈을 떴다. 가로등 불빛은 그의 얼굴을 반밖에 비추지 않아 자성의 얼굴을 더욱 기묘하게 만들었다. 빛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눈은 의중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드메에 욕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몇 번이고 태일의 손등에 입 맞추던 자성은, 이번에도 예고 없이 짐승처럼 이를 박았다. , 하고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태일은 소리 없이 비명 질렀다. 밭은 신음이 훌쩍임을 대신했다. 자성의 흰 입가가 붉었다, 붉다 못해 검었다. 태일의 몸뚱어리가 흐른 피로 가득했다. 바지와 속옷이 그 피들을 전부 먹고 있었다. 자성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단숨에 끌어내리곤, 저 쪽 침대 발치로 던져 버렸다. 태일이 마구 발버둥 쳤다. 하지만 피가 나갈 대로 나간 그의 몸은 영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태일은 자성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기억했다.

 

태일 씨.”

 

영원히 살고 싶다면서요. 무정한 말들이 가슴을 찔렀다. 울고 싶었다. 자성은 허리를 숙여 그를 껴안았다. 왜 그랬어요? 그가 태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죄책감은 없었다.

 

왜 청이 형님을 죽였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마요... 평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자성의 손가락은 이제 태일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무책임한 밤이었다. 태일의 온 몸을 탐욕스럽게 주무르고 쓸며, 자성은 잠시 눈을 감기로 했다. 투병하느라 부쩍 마른 피부들이 거칠했다. 허벅지 안쪽에, 장딴지에, 복숭아뼈에 이를 박았다. 울렁울렁 밖으로 기어 나오는 따뜻한 냄새가 온통 자신의 것이었다. 태일 씨, 일어나요. 자성이 태일의 어께를 흔들었다. 태일이 작게 눈을 뜨고, 자성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일 씨가 청이 형님을 죽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제 태일 씨가 제 것이 되는 걸로 합시다.”

 

자성이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내가 영원히 살게 해준다고 했잖아요. 뾰족한 키스가 쉼 없이 내려왔고, 자성이 바지춤을 내리는 이질적인 소리가 끼어들었다. 웃는 낯과 다르게 손가락은 아래쪽으로 마구 쑤셔 들어왔고, 태일은 다 쉰 목으로 쌕쌕 소리 지르고 있었다. 피해자만 없고, 가해자만 있는 밤이었다. 울지 마요, 울고 싶은 건 나에요. 자성이 가만히 속삭였다. 혹은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윤활제로는 눈물과 피가 쓰였다. 미안해요, 우리 처음 잘 땐 이것보다 더 좋은 걸 쓰고 싶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능청스럽고 다정한 말투에 태일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몸이 반절로 갈라지는 아픔이 살을 비집고 들어왔다. 신음소리가 쏟아지기도 전에 자성의 손이 태일의 목울대를 잡았다. 짓이겨진 곳을 잡았는지 피가 터졌다.

 

, 내 앞에, 나타난 겁니까?”

, , 으으..., ..”

 

태일이 손을 디딘 모든 곳에 핏빛 그림자가 졌다. 시트는 이제 온통 붉은빛으로 젖어, 몸 닿는 모든 곳이 끈적끈적했다. 자성이 허리짓을 한 번 할 때마다 태일은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았다. 처음엔 정말로, 이럴 줄 몰랐는데. 영원히 살고 싶다고 난 장난으로 욕심 부렸을 뿐인데. 자성이 팔뚝 안쪽의 연한 살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멍이 아주 크게 들 것이다. 욕망만큼의 멍이. 태일은 멍하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자성이 태일의 어께를 껴안고 앉혔다.

 

미안해요, 많이 축축하죠.”

 

쓸데없는 배려, 그 속의 비아냥거림. 태일은 제 아랫배가 화끈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뻑뻑한 입구는 결국 찢어져 피가 주르르 흐를 것이다. 자성이 태일을 꼭 껴안았다. 짐승이 제 새끼를 꼭 껴안듯. 자성이 태일의 팔을 제 어께에 올렸다. 천천히 그가 어께에 이를 박아 넣었다. 태일의 몸이 움찔, 작게 떨렸고, 자성을 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자성이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대견하다는 듯 그가 태일의 등을 쓰다듬었다.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것은 너무나도 금방이었다. 증오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자성은 그렇게 몇 번을 더 움직이다 태일의 안에 결국 파정했다. 몇 번 숨을 고른 다음, 자성은 흐트러진 머리와 셔츠를 바로 하고 태일을 내려다봤다. 온통 피투성이였다. 동백꽃 같다. 자성은 작은 가재수건으로 태일의 얼굴을 닦았다.

 

태일 씨, 눈 좀 떠 봐요.”

 

태일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게 금방이라도 푹 꺼질 것 같았다. 연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빠져 죽고 싶었다. 자성은 그 눈을 멍하니 보다, 퍼뜩 병원복과 아까 침대 발치에 던져놨던 옷가지들을 주웠다. 그리고 태일에게 주섬주섬 입히고는, 휠체어를 펴고 태일을 앉혔다. 짐승이 제 새끼를 챙기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인가! 자성은 제 자켓을 태일의 어께에 걸쳤다. 동백꽃 같은 침대와 작별해야 할 시간이었다. 자성은 미끄러지듯 그렇게 병원 복도를 나섰다. 마태복음에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네 원수를 사랑해라. 그리고 그것을 지금 실천하고 있는 자신은 얼마나 기독교적으로 완벽한 사람인가. 자성이 살짝 태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은 목포로 가야겠다, 마지막으로는 여수에서 사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영원히. 밤 비행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반짝 반짝이는 별을 만들며. 밤하늘을 찢어가며.

, 반쪽짜리 사랑, 반쪽짜리 만남. 정말로 사랑한다면, 죽게 그냥 내버려뒀어야 하는 건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사랑은, 집착은, 두려울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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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au로 자청 보고싶다dsafsdfsdsfaa

신부 이자성.. 글구 동네 아저씨 정청

 

 

 작고 폐쇄된 마을에 이자성이 돌아오고 마을은 시끄러워진다. 왜냐면 이자성은 죽었었기 때문에.

 자성은 그 마을의 일약 스타가 되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어디선가 나오는 배덕한 느낌은 잊을 수가 없겠지, 자신도 어떻게 되었는지 확실히 모르는 나날이 계속될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도 너무 많이 왔다. 말 그대로 상처입고 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 고통스러웠지만 그 이전에 원초적인 욕망에 휩싸였다. 그렇게 매일 밤 뜬눈으로 밤을 새고 또 아침이 되면 어두운 예배실 안에서 기도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정청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이자성을 찾아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웃집 사람이 한번 보자는 식으로 얘기해도 청은 그를 볼 생각을 하나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죽었다 살아난 사람인데 그게 뭐가 대단하냐면서, 청 또한 몇 번 죽을 고비를 들락날락거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 어귀로 들어오던 그 남자의 희멀건한 얼굴도 처음에는 영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그러다 청이 밤새도록 쌈박질을 했던 그날 밤, 성당으로 숨어들어간 날. 푸르스름한 빛을 잔뜩 먹은 이자성의 얼굴은 하얗게 빛났고-마치 이 세상 게 아닌 것처럼- 청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먼지 냄새 나는 성당은 푹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요란했다.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훔칠 생각도 안 하고 멍하니 있던 청, 바깥에서 싸우는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자성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오직 살아 있는 건 이 공간 속에서 자기밖에 없는 것처럼. 거친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각목으로 거하게 맞은 후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일쯤이면 아마 검붉은 멍이 크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온몸에서 온통 짠 비린내가 난다. 검은 평상복을 입은 이자성은 청을 응시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질적이다, 이자성은 온통 침묵과 정적이었고 정청은 동그 자체였다. 그에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자성은 천천히 청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소원밖에 없었던 곳은,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장소나 다름이 없었다. 청은 뒷걸음질 하는 것도 잊은 채 자성과 눈을 마주쳤다. 온통 검었다. 그의 발걸음은 조급했으나 여유로웠고, 신사다웠으나 배덕했다. 청의 동물이 속에서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것은 위험하니 어서 피하라고, 하지만 경고는 경고로만 그치고 어느새 청의 바로 앞까지 자성이 다가왔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도와주려고 다가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자성의 긴 손가락이 그것을 중간에서 끊었다.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바닥에 깔린 먼지처럼. 일어나라고 내민 손은 마치 파리지옥의 목젖 같았다. 그래서 청은 쉽게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뜨듯미지근한 코피는 계속 턱에서 망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차게 식은 피는 젤리처럼 변해 길게 늘어지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은 먼지와 섞여 시멘트처럼 굳은 지 오래다.

 

안 다쳤으니께 건들지 마...”

 

 청의 연갈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자성의 흰 손 위에 끈적하고 건조한 피가 덕지덕지 묻었다. 제가 닦아드릴게요, 자성의 손은 천천히, 하지만 탐욕스럽고 우악스럽게 그것을 닦았다. 청의 얼굴에도 그만큼 피가 지나간 자리가 선명했다. 청은 알 수 없는 기분에 몸을 작게 떨었고, 자성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반복하고 있었다. 흰 손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손톱 사이사이에 낀 검은 피 때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빛이라곤 창문에서 기어오는 달빛이 전부였고, 서로의 시선은 무딘 거울 파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이 처음 보는 남자는, 이자성의 원초적 배덕심을 관통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천천히 제 검지를 입으로 가져다댔다. 창백한 얼굴과는 다른 새빨간 혀가 그것을 훑었고, 청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제 열 손가락을 빠짐없이 핥은 혀는 손바닥으로 향했지만 그의 눈은 집요하게 청을 찾았다. 너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원망까지 하는 것 같은 그의 눈에도 불구하고 청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탐욕스럽게 손바닥을 핥던 자성은, 이내 손톱을 천천히 물어뜯기 시작했다. 흰 앞니로 자근자근 새끼손톱부터 짓이기곤 퉤, 하고 뱉은 후 손톱 사이에 낀 피까지 갉았다. 청의 떨리는 손등 옆으로 손톱들이 마구 떨어졌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엄지손톱을 물어뜯는 순간, 청이 헐레벌떡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성은 그것을 뒤에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구 달리는 그가 창문 너머로도 보이지 않았을 때 드디어 자성은 풀썩 주저앉아 제가 뱉어낸 손톱들을 하나하나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울퉁불퉁한 손톱이 보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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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19. 22:55 신세계

자성청 :: 명왕성

선님   이 상의원 그림 그려주셔서... 자성청 써서 드립니다... 헷... 


이거 들으면서 씀... 장화홍련 ost 돌이킬 수 없는 걸음 

https://www.youtube.com/watch?v=mAi9JL8qAGM








 이자성은 항상 꿈을 꾼다. 사실 처음부터 그가 꿈을 꿨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꿈을 꾸지 않고 새까만 침묵으로만 이루어진 밤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정청이 죽고 나서 그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그가 아주 오랜만에 잠을 청한 날이었다. 침묵 위에 하얀 실루엣이 움직이고, 하얀 정장 상의와 까만 선글라스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자성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것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청의 선글라스에 자성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그것 또한 손처럼 희었다. 먼저 말문을 튼 것은 청이었다. 꿈 속의 청은 여전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청의 입은 얄밉게도 움직움직댔지만 자성은 그것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알았노라고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청은 만족한 얼굴로, 자성의 어께를 툭툭 치더니 그대로 뒤돌아 가버렸다. 그의 하얀 등이 검은 침묵 속에서 창백하게 빛나고, 빛의 잔상은 결국 자성의 눈을 멀게 했다. 청이 하얀 점으로 사라지고 나서, 역시 온 세상이 점멸한 듯 즈즈즈, 소리를 내며 꺼졌다. 암흑뿐이었다. 그리고 자성은 천천히 눈을 뜬다. 누가 제 위에서 소금물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식은땀이 가득했다. 오전 다섯 시 사십 칠 분, 커튼 사이로 기어들어오는 빛은 푸르스름했다. 그리고 그것이 난생 처음 꾼 자성의 꿈이었다. 닭똥같은 눈물이 그의 눈에서 쉼없이 흘렀다. 흰 시트에 투명한 눈물이 굴러떨어지는데도, 시트는 마치 꿈에서 봤던 그의 등짝처럼 진한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끝없이 나올 것 같은 눈물을 다시 집어넣으려 그는 얼굴을 감쌌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희고 긴 손가락은 떨림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지만, 이곳에서 어둠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남극의 백야는 그렇기 때문에 슬펐다. 새벽의 부산함이 그와는 아무 상관 없는 듯 명랑했다.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다 자성은 아주 오랜만에 여수 생각을 했다. 




*




 부스스한 얼굴로 청이 눈을 비볐다. 빛이 안 드는 방은 아침이 언제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딱히 일이 없는 날은 오후까지 푸지게 잠만 자기 일쑤였고, 그날도 그랬다. 전날 술도 마시지 않고 잠을 잤건만. 그날 꿈에서 만난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표정만큼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을 만큼 침울하고 무거워, 처음에 청은 불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온통 새까만 정장을 입고는, 잔뜩 가라앉은 눈동자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았더랬다. 청이 몇 번이고 말을 걸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마치 저 뒤를 보는 것 같은 눈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눈물 떨어지는 것이 꼭 한천 덩어리처럼 바닥으로 뚝뚝 추락했다. 남자는 이제 꺽꺽대는 소리까지 내며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이 너무나도 서러워 보였지만 청이 해줄 수 있는 건 그 남자의 어께를 두드려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의 왼쪽 팔엔 두 줄짜리 상주 완장이 슬프게 걸려 있었다. 장례식은 항상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슬픔과 한천 눈물과 두 줄 완장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그때문에 먹먹했다. 남자의 창백한 얼굴과 검은 양복, 희여멀건한 완장 때문에 꿈의 진행은 꼭 싸구려 흑백 영화 같았다. 


"울지 말어."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깜짝 놀란 눈으로 청을 바라봤고, 청은 그 새까만 눈에 비친 자신을 보고, 그 눈동자 속 남자를 보고...자신을 보았다. 거울의 잔상들, 찰나의 시간 속 영겁의 눈빛이 오갔다. 흰 국화의 모가지가 뚝, 떨어지고 향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 순간 청이 퍼뜩 눈을 떴다. 향과 국화는 온데간데 없었고, 빛도 안 들어오는 주제에 햇빛 냄새만 진하게 났다.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마루로 나가 속절없이 바깥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울퉁불퉁한 담장, 내려다보이는 바다, 미처 못 핀 동백꽃. 바깥은 이렇게 밝고 맑은데, 어째서 그 남자는 속에서부터 곪았는지 모른다. 울지 말어, 울지 말어라.  울며 보내기엔 이 봄이 너무나도 아깝다. 




*




 자성은 그 날 이후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청이 바로 눈 앞에 어른거려서, 일어날 때마다 꼭 목부터 치고 올라오는 울음기에 소리죽여 눈물을 쏟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꿈은 점점 선명해졌다. 흑백에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꿈 속 세계는, 색도 선명해지고 만질 수도 있었다. 희미하지만 소리도 들렸다. 울지 말어, 그게 자성이 기억했던 유일한 말이었다. 시간을 역으로 돌아가고 있는 꿈이었다. 죽기 직전의 청, 상해에서 돌아와 선물을 잔뜩 사왔던 청, 가창 최근 꿈은, 인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였다. 우리의 청춘은, 패기와 악밖에 없었지. 사람 배를 갈트리는 것도 큰 일은 아니었기에 눈 깜짝 하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자성은 말없이 일어나 담배를 빼어물고는 창 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고, 다른 말이 없었다. 이제 곧 2월의 마지막 주였고, 3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백꽃도 다가올 것이다. 온 세상이 그 꽃숭어리 천지였다. 눈 밑 그늘 가득한 얼굴로 자성이 작게 웃었다. 그떄는 재밌었지. 제 꼬시리가 싫다며 머리를 밤숭어리처럼 깎은 청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슬픔은 가슴에서 나와 목을 치고 얼굴로 나온다. 담배를 끝까지 피운 적은 청이 떠난 후 딱 한번이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반절로 꺾었다. 재떨이에 마구 비비고, 가루를 날렸다. 빛은 잘 들어오지만 사무실은 항상 무채색이다. 밖은 봄이지만 이곳은 항상 겨울이었다. 오늘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잠들면 역시 꿈에 청이 나올 것이다. 인천에 오기 전의 우리는 태안에, 군산에, 목포에 있었다. 그날 밤 자성은 또 꿈을 꾼다. 청을 기억하는 것은 꿈과 바다밖에 없었다.


"자성아, 성아."

"왜요."

"왜 그렇게 야불아졌냐."

"요즘 힘드네요, 그래."


 온 세상이 빨간 꽃잎 투성이었다. 갈색 눈동자가 화아, 하고 웃었다. 무채색의 사무실 따위와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봄이다. 청이다. 꿈은 더이상 창백할 수 없었다. 청이 꽃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바깥은 어떨지 몰라도 꿈만큼은 항상 봄이었다. 꿈에서는 울지 않았다. 눈물로 썼다 지운 편지들은 이곳에 없었다. 꿈 속의 청은 밤송이같은 머리를 기웃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꽃잎이 가득 날리는, 바다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하는 이곳은 여수였다. 

 



*




 청 또한 며칠 사이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마루에 앉아 있다 깜빡 졸았을 때, 그 전날 흠씬 두들겨 맞고 와 쑤시는 몸으로 잠을 청했을 때, 어김없이 그때의 그 창백한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면상 참 좆같이 생겼다야, 청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치려는 노력은 계속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경찰 정복을 입고 있었고, 어느 날은 동네 청년들처럼 입고 나왔으며 또 어떤 날에는 어느 회사의 사원처럼 멀끔하게 입고 나왔다. 눈물을 떨어트리는 대신 머쓱한 웃음을 짓는 날이 많아졌다. 


"그짝 이름이 뭐여?"

"자성이요, 이자성."


 자성이, 이자성이... 이름도 좆겉네잉. 저번보다는 제법 살가워진 자성이 핀잔을 줬다. 상복을 입은 남자와 동일인이라고 쉽사리 생각되지 않았다. 제법 눈웃음이 잘어울렸다. 꿈을 꾼 지 제법 오래 되었지만 여수 시내를 아무리 뒤져도 이자성이라는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 살어?"

"여수요."

"너 읎든디? 내가 시내를 다 뒤져봤어야."

"곧 갈 거요."


 곧? 언제? 청이 자성을 돌아봤다. 순간 동백꽃이 화드라지게 피었다.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꽃에 먹혀, 꽃을 먹어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꽃을 헤치고 자성에게로 가려다, 결국 꿈에서 나와버리고 말았다. 잠에서 깨보니 벌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어서, 청은 전등불을 켰다. 아직도 숨이 턱턱 막혔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안개같은 비가 내렸다. 청은 마루로 나가 앉아 멍하니 반짝반짝 빛나는 비를 쳐다봤다. 머릿속이 즈즈즈, 하고 울렸다. 정말로 이자성이 올 수 있을까?




*




 꿈은 항상 봄이지만, 꿈에서 깼을 때의 세계는 봄이 아닐 수도 있다. 자성은 결국 그날 점심 여수로 가기로 결심했다.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거리는 360 km였다. 어째서인지 그곳으로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거짓말처럼 청이 거기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세상이 거짓말이어도 좋다. 거짓말처럼, 이게 얼마나 큰 말이었는지.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서 오징어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주는 예전에 살았던 곳 앞 수퍼에서 살 것이다. 여수에 도착하면 아마 한밤중이 될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빛은 비에 가려 누가 지우개로 문지른 듯 뭉개졌다. 어두운 산허리는 커다란 동물처럼 가만히 움츠리고 있었다. 바다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비는 끊임없이 오고 있었고, 집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은 시멘트를 새로 깐 걸 빼고 여전했다. 트렁크에 우산이 있었지만 자성은 쓰고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흙 냄새가 잔잔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며 자성은 목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슬픔이 목을 치고 있었다. 셔츠도, 머리카락도,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민물과 짠물이 동시에 만나는 곳. 꺽꺽거리면서도 자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고, 익숙한 초록 대문 앞에 서서 들어가기를 한참을 고민했다.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다 식어버린 오징어와 소주를 품에 안고 목놓아 울었다. 거짓말로 청이 이 안에 있다고 하자. 거짓말이어도 좋으니. 앞에는 검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담장 너머에는 동백꽃이 화드라지게 앉아있고, 노랗고 어두운 가로등은 눈물을 비추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화난 듯 몰아쳤던 장대비는 어느새 새하얀 안개비로 바뀌어 있었다. 코가 시렸다. 자성은 천천히 대문을 열었다. 마루 불은 여전히 눈 시려운 백열등이었다.인기척을 듣고 밖으로 나온 밤숭아리 머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이 마주치고, 자성은 손에 들고 있는 걸 전부 내던지고 청에게로 뛰어갔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이어도 좋다. 청을 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청도 가만히 자성의 등을 쓸었다. 자성아, 너가 곧 온다구 했지. 꿈에서. 녹색 대문 앞에서 황망히 서있던 자성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소주병이 깨지고 희미한 빛 아래 그 파편은 비와 함께 빛났다. 제 몸에 기대 몇 번이고 꺽꺽대며 울음을 토해내는 자성은 그간 꿈에 나왔던 모든 이자성의 모습이었다. 꽃잎 대신 비가 화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처마 끝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만 통 통 났다. 울며 보내기엔 이 봄이 너무나도 아까웠지만, 아무래도 봄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울지 말어, 자성아. 응? 성아, 내가 몇 번이나 말혔냐."


 서럽게 우는 자성의 머리 위로, 그런 자성을 쓸어 주는 청의 머리 위로 비가 내려앉았다. 꽃잎이 가득 날리는, 바다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하는 이곳은 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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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uferstehung

2015. 1. 13. 00:25 신세계

자성태일 :: 막





겨울의 해망동은 항상 추웠다. 뺨이 아린 바람은 바다에서부터 이곳까지 달려오곤 했다. 밖에 걸어둔 물메기가 꽁꽁 얼어버리진 않을까, 한태일은 난로를 쬐며 가만히 생각했다. 눈이 많이 내렸다. 이렇게 많이 내린 건 본 적이 없다. 하늘에서 구멍이 뚫렸나, 씨발. 태일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오늘 이래가지고 수금도 못 돌겠네. 뭔 눈이 이렇게 많이 오고 지랄야, 지랄이."

사무실은 적막했다. 빛 한번 제대로 들지 못했던 창문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눈부시다, 태일은 눈을 끔뻑였다. 출렁이는 파도 위 배들이 위태로웠다. 헛발질을 하는 자동차들은 애처로웠고. 낡은 브라운관 TV는 계속 전북의 대설주의보를 무의미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고립, 태일은 어디에선가 본 단어를 생각했다. 고립당했다. 아무도 저를 찾으러 오지 않을 것이다. 철제 창문 틀 사이로 매정한 바람이 들어왔다. 눈만 오면 참 괜찮을텐데, 바닷바람까지 같이 들어오니 죽을 맛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월명동이나 시장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지만 종아리까지 오는 눈을 헤치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도 고립되었을까? 태일이 가만히 담뱃불을 댔다. 그이들은 아마 눈 맞는 작은 짐승처럼 서로 꼭 붙어 옹기종기 온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태일은 애먼 난초 이파리를 잡아당겼다. 바다에 눈이 먹히고 있었다, 튀어나온 불티가 다시 모닥불 속으로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바람이 전깃줄을 때리고, 창문이 성난듯 덜컹거렸다. 귀신같이 태일의 전화기가 울렸다.

"예에, 여보세요?"

한태일 부장님, 한태일 씨-맞으시죠? 단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태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찾는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태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예, 맞는데요. 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머니에 있던 손은 문틈 사이로 흘러오는 바람을 맞아 새빨갛게 된지 오래였다.

"실례지만, 지금 어딘지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댁이십니까?"
"아뇨, 사무실인데요. 근데 누구셔요?"
"서울 쪽 지부인데, 일이 하나 생겨서 한태일 부장님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큰일은 아니니 잠시 들렀다 가겠습니다."

예에, 그러세요- 태일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기고 태일은 옷 속으로 들어오는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부터 서울 어드메에 사무실을 또 냈대, 담배는 이미 다 타들어간 지 오래다. 그쪽은,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떻게 오려는지. 군산에서 제법 살아왔던 태일도 폭설 주의보는 오랜만이었다. 꼬마애들은 집 앞에서, 월명공원에서, 삼삼오오 모여 놀다 잔뜩 지친 몸을 끌고 저희들 집으로 갈 것이었다. 어른들은 집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거나, 자기네들이 온 곳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태일이 눈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순간 덜컥, 하고 얇은 철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태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양복에 쓸어올린 머리, 멀끔하고 희멀건한 얼굴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까 전화로 온다고 하셨었나?"

그래, 무슨 일이 생겼소? 태일이 낯선 방문객을 훑어보며 웃었다.

"이자성이라고 합니다."

낯선 방문객 이자성이 손을 내밀었다. 태일이 그 손을 맞잡았다. 백짓장처럼 하얀 손은 역시 딱 그만큼의 온도로 차가웠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표정만큼은 죽은 사람을 다시 보는듯한, 당혹감과 희망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 보아하니 어엄청 큰 일인 것 같은데, 서울에서부터 오시고."
"예에, 눈도 많이 오네요.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자성의 구두소리는 가벼웠다, 무겁기도 했다. 그를 눈밭에 가져다 놓으면 검은 양복과 구두, 머리카락밖에 안 보일 거라고 태일은 생각했다. 둘 사이 마주앉은 공기가 무거웠다. 자성은 제법 오래 태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재난이다, 재해다. 자성은 처음으로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저를 삼킬것만 같던 눈을 헤치고 온 보람이 있었다.

"저, 그러니까 도대체 뭔 일이 있길래 온 거요?"
"태일 씨."
"예?"
"여기 원래 이렇게 눈이 많이 옵니까?"
"아니, 막…오진 않구, 참, 이번에 특히 지랄처럼 오데요?"

자성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죠, 여긴 원래 눈이 잘 안 오죠. 바람이 많이 불면 모를까. 여수도 꼭 그랬다. 바닷바람은 거셌고, 비렸다. 자성의 구두에 떨어진 눈송이가 어느새 녹아 물구슬로 흘러내린다. 서로가 서로를 유령 같다고 생각한다. 안개처럼 잡을 수 없다고, 어느 새 사라질 것이라고.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자성이 가는 길은 통제불능이 될 것이고, 그것은 태일과 함께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둘이 함께 고립될 것이다. 거칠게 부는 눈보라에 흠씬 두들겨 맞고 결국 정신을 잃을 때까지. 자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태일에게 한 번 더 웃었다.
너를 사랑해, 이 기막힌 재난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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