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19. 22:55 신세계

자성청 :: 명왕성

선님   이 상의원 그림 그려주셔서... 자성청 써서 드립니다... 헷... 


이거 들으면서 씀... 장화홍련 ost 돌이킬 수 없는 걸음 

https://www.youtube.com/watch?v=mAi9JL8qAGM








 이자성은 항상 꿈을 꾼다. 사실 처음부터 그가 꿈을 꿨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꿈을 꾸지 않고 새까만 침묵으로만 이루어진 밤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정청이 죽고 나서 그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그가 아주 오랜만에 잠을 청한 날이었다. 침묵 위에 하얀 실루엣이 움직이고, 하얀 정장 상의와 까만 선글라스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자성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것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청의 선글라스에 자성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그것 또한 손처럼 희었다. 먼저 말문을 튼 것은 청이었다. 꿈 속의 청은 여전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청의 입은 얄밉게도 움직움직댔지만 자성은 그것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알았노라고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청은 만족한 얼굴로, 자성의 어께를 툭툭 치더니 그대로 뒤돌아 가버렸다. 그의 하얀 등이 검은 침묵 속에서 창백하게 빛나고, 빛의 잔상은 결국 자성의 눈을 멀게 했다. 청이 하얀 점으로 사라지고 나서, 역시 온 세상이 점멸한 듯 즈즈즈, 소리를 내며 꺼졌다. 암흑뿐이었다. 그리고 자성은 천천히 눈을 뜬다. 누가 제 위에서 소금물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식은땀이 가득했다. 오전 다섯 시 사십 칠 분, 커튼 사이로 기어들어오는 빛은 푸르스름했다. 그리고 그것이 난생 처음 꾼 자성의 꿈이었다. 닭똥같은 눈물이 그의 눈에서 쉼없이 흘렀다. 흰 시트에 투명한 눈물이 굴러떨어지는데도, 시트는 마치 꿈에서 봤던 그의 등짝처럼 진한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끝없이 나올 것 같은 눈물을 다시 집어넣으려 그는 얼굴을 감쌌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희고 긴 손가락은 떨림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지만, 이곳에서 어둠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남극의 백야는 그렇기 때문에 슬펐다. 새벽의 부산함이 그와는 아무 상관 없는 듯 명랑했다.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다 자성은 아주 오랜만에 여수 생각을 했다. 




*




 부스스한 얼굴로 청이 눈을 비볐다. 빛이 안 드는 방은 아침이 언제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딱히 일이 없는 날은 오후까지 푸지게 잠만 자기 일쑤였고, 그날도 그랬다. 전날 술도 마시지 않고 잠을 잤건만. 그날 꿈에서 만난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표정만큼은 죽은 사람인지 산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을 만큼 침울하고 무거워, 처음에 청은 불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온통 새까만 정장을 입고는, 잔뜩 가라앉은 눈동자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았더랬다. 청이 몇 번이고 말을 걸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마치 저 뒤를 보는 것 같은 눈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눈물 떨어지는 것이 꼭 한천 덩어리처럼 바닥으로 뚝뚝 추락했다. 남자는 이제 꺽꺽대는 소리까지 내며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이 너무나도 서러워 보였지만 청이 해줄 수 있는 건 그 남자의 어께를 두드려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의 왼쪽 팔엔 두 줄짜리 상주 완장이 슬프게 걸려 있었다. 장례식은 항상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슬픔과 한천 눈물과 두 줄 완장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그때문에 먹먹했다. 남자의 창백한 얼굴과 검은 양복, 희여멀건한 완장 때문에 꿈의 진행은 꼭 싸구려 흑백 영화 같았다. 


"울지 말어."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깜짝 놀란 눈으로 청을 바라봤고, 청은 그 새까만 눈에 비친 자신을 보고, 그 눈동자 속 남자를 보고...자신을 보았다. 거울의 잔상들, 찰나의 시간 속 영겁의 눈빛이 오갔다. 흰 국화의 모가지가 뚝, 떨어지고 향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 순간 청이 퍼뜩 눈을 떴다. 향과 국화는 온데간데 없었고, 빛도 안 들어오는 주제에 햇빛 냄새만 진하게 났다.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마루로 나가 속절없이 바깥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울퉁불퉁한 담장, 내려다보이는 바다, 미처 못 핀 동백꽃. 바깥은 이렇게 밝고 맑은데, 어째서 그 남자는 속에서부터 곪았는지 모른다. 울지 말어, 울지 말어라.  울며 보내기엔 이 봄이 너무나도 아깝다. 




*




 자성은 그 날 이후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청이 바로 눈 앞에 어른거려서, 일어날 때마다 꼭 목부터 치고 올라오는 울음기에 소리죽여 눈물을 쏟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꿈은 점점 선명해졌다. 흑백에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꿈 속 세계는, 색도 선명해지고 만질 수도 있었다. 희미하지만 소리도 들렸다. 울지 말어, 그게 자성이 기억했던 유일한 말이었다. 시간을 역으로 돌아가고 있는 꿈이었다. 죽기 직전의 청, 상해에서 돌아와 선물을 잔뜩 사왔던 청, 가창 최근 꿈은, 인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였다. 우리의 청춘은, 패기와 악밖에 없었지. 사람 배를 갈트리는 것도 큰 일은 아니었기에 눈 깜짝 하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자성은 말없이 일어나 담배를 빼어물고는 창 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고, 다른 말이 없었다. 이제 곧 2월의 마지막 주였고, 3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백꽃도 다가올 것이다. 온 세상이 그 꽃숭어리 천지였다. 눈 밑 그늘 가득한 얼굴로 자성이 작게 웃었다. 그떄는 재밌었지. 제 꼬시리가 싫다며 머리를 밤숭어리처럼 깎은 청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슬픔은 가슴에서 나와 목을 치고 얼굴로 나온다. 담배를 끝까지 피운 적은 청이 떠난 후 딱 한번이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반절로 꺾었다. 재떨이에 마구 비비고, 가루를 날렸다. 빛은 잘 들어오지만 사무실은 항상 무채색이다. 밖은 봄이지만 이곳은 항상 겨울이었다. 오늘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잠들면 역시 꿈에 청이 나올 것이다. 인천에 오기 전의 우리는 태안에, 군산에, 목포에 있었다. 그날 밤 자성은 또 꿈을 꾼다. 청을 기억하는 것은 꿈과 바다밖에 없었다.


"자성아, 성아."

"왜요."

"왜 그렇게 야불아졌냐."

"요즘 힘드네요, 그래."


 온 세상이 빨간 꽃잎 투성이었다. 갈색 눈동자가 화아, 하고 웃었다. 무채색의 사무실 따위와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봄이다. 청이다. 꿈은 더이상 창백할 수 없었다. 청이 꽃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바깥은 어떨지 몰라도 꿈만큼은 항상 봄이었다. 꿈에서는 울지 않았다. 눈물로 썼다 지운 편지들은 이곳에 없었다. 꿈 속의 청은 밤송이같은 머리를 기웃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꽃잎이 가득 날리는, 바다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하는 이곳은 여수였다. 

 



*




 청 또한 며칠 사이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마루에 앉아 있다 깜빡 졸았을 때, 그 전날 흠씬 두들겨 맞고 와 쑤시는 몸으로 잠을 청했을 때, 어김없이 그때의 그 창백한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면상 참 좆같이 생겼다야, 청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치려는 노력은 계속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경찰 정복을 입고 있었고, 어느 날은 동네 청년들처럼 입고 나왔으며 또 어떤 날에는 어느 회사의 사원처럼 멀끔하게 입고 나왔다. 눈물을 떨어트리는 대신 머쓱한 웃음을 짓는 날이 많아졌다. 


"그짝 이름이 뭐여?"

"자성이요, 이자성."


 자성이, 이자성이... 이름도 좆겉네잉. 저번보다는 제법 살가워진 자성이 핀잔을 줬다. 상복을 입은 남자와 동일인이라고 쉽사리 생각되지 않았다. 제법 눈웃음이 잘어울렸다. 꿈을 꾼 지 제법 오래 되었지만 여수 시내를 아무리 뒤져도 이자성이라는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 살어?"

"여수요."

"너 읎든디? 내가 시내를 다 뒤져봤어야."

"곧 갈 거요."


 곧? 언제? 청이 자성을 돌아봤다. 순간 동백꽃이 화드라지게 피었다.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꽃에 먹혀, 꽃을 먹어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꽃을 헤치고 자성에게로 가려다, 결국 꿈에서 나와버리고 말았다. 잠에서 깨보니 벌써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어서, 청은 전등불을 켰다. 아직도 숨이 턱턱 막혔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안개같은 비가 내렸다. 청은 마루로 나가 앉아 멍하니 반짝반짝 빛나는 비를 쳐다봤다. 머릿속이 즈즈즈, 하고 울렸다. 정말로 이자성이 올 수 있을까?




*




 꿈은 항상 봄이지만, 꿈에서 깼을 때의 세계는 봄이 아닐 수도 있다. 자성은 결국 그날 점심 여수로 가기로 결심했다.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거리는 360 km였다. 어째서인지 그곳으로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거짓말처럼 청이 거기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세상이 거짓말이어도 좋다. 거짓말처럼, 이게 얼마나 큰 말이었는지.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서 오징어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주는 예전에 살았던 곳 앞 수퍼에서 살 것이다. 여수에 도착하면 아마 한밤중이 될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빛은 비에 가려 누가 지우개로 문지른 듯 뭉개졌다. 어두운 산허리는 커다란 동물처럼 가만히 움츠리고 있었다. 바다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비는 끊임없이 오고 있었고, 집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은 시멘트를 새로 깐 걸 빼고 여전했다. 트렁크에 우산이 있었지만 자성은 쓰고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흙 냄새가 잔잔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며 자성은 목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슬픔이 목을 치고 있었다. 셔츠도, 머리카락도,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민물과 짠물이 동시에 만나는 곳. 꺽꺽거리면서도 자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고, 익숙한 초록 대문 앞에 서서 들어가기를 한참을 고민했다.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다 식어버린 오징어와 소주를 품에 안고 목놓아 울었다. 거짓말로 청이 이 안에 있다고 하자. 거짓말이어도 좋으니. 앞에는 검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담장 너머에는 동백꽃이 화드라지게 앉아있고, 노랗고 어두운 가로등은 눈물을 비추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화난 듯 몰아쳤던 장대비는 어느새 새하얀 안개비로 바뀌어 있었다. 코가 시렸다. 자성은 천천히 대문을 열었다. 마루 불은 여전히 눈 시려운 백열등이었다.인기척을 듣고 밖으로 나온 밤숭아리 머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이 마주치고, 자성은 손에 들고 있는 걸 전부 내던지고 청에게로 뛰어갔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이어도 좋다. 청을 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청도 가만히 자성의 등을 쓸었다. 자성아, 너가 곧 온다구 했지. 꿈에서. 녹색 대문 앞에서 황망히 서있던 자성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소주병이 깨지고 희미한 빛 아래 그 파편은 비와 함께 빛났다. 제 몸에 기대 몇 번이고 꺽꺽대며 울음을 토해내는 자성은 그간 꿈에 나왔던 모든 이자성의 모습이었다. 꽃잎 대신 비가 화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처마 끝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만 통 통 났다. 울며 보내기엔 이 봄이 너무나도 아까웠지만, 아무래도 봄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울지 말어, 자성아. 응? 성아, 내가 몇 번이나 말혔냐."


 서럽게 우는 자성의 머리 위로, 그런 자성을 쓸어 주는 청의 머리 위로 비가 내려앉았다. 꽃잎이 가득 날리는, 바다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하는 이곳은 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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